스프링 스피릿
“생을 향한 조용하지만 변화무쌍한 식물의 움직임은 태양과 땅과 바람과 비가 만들어낸 이 세계의 가장 강력한 시각적 발현이다. 계절 안에 서 있는 나는 바로 이 순간 생의 아름다움과 마주하고 있다.” /한수정. 나는 식물을 따라 걷기로 했다.
며칠 전에, 정말 뜻하지 않게. 어디선가 갑작스레 벚꽃을 봤다. 어디더라. 하루 종일 굶다가 엄마 생각에 밥은 먹어야지 생각하며 혼자 메밀국수를 먹으러 갔던 날이었던가. 아무튼 강북동쪽 어딘가를 거닐다 우연히 햇빛이 유독 강한 자리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에 매달려 활짝 피어있는, 벚꽃을 봤다. 옆에 나란히 선 나무들은 아직 몽우리를 머금고 잠들어 있는데. 혼자 일찍 깨어 활짝 피어 있는 벚나무의 풍경을 보며 꿰어질 듯 꿰어지지 않는 엄마의 사랑 한가지만 생각했다. 신비한 봄 햇볕의 힘을 무심하게 멍하니 바라 보며, 내 쓴 속을 벗어날 순 없었다.벚꽃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아퀴나스적 자연 계시니 철학이니 신학이니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 따위 없었고, 아까 반납한 따릉이에 놓고 온 식빵과 지갑이 담긴 에코백을 가지러 가느라 정신이 없었던가. 아무튼 그랬다.
일찍 핀 벚꽃을 바라보며 내 엉혼의 몽우리에서 잠깐 떠올랐던 건, 내 안, 저 깊숙한 곳에서 아지랑이만 피어올리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모르겠다. 하나님한테 나는 잔뜩 틀어져 있는 것 같고. 이 괴로운 심사가 풀릴 수는 있을지. 풀린다면 언제 어떻게 풀리게 될지 나는 알 수 없다. 그게 풀어지지 않으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아무튼 이번 봄에는 벚꽃을 이렇게 보게 되는구나... 생각했다. 돌아보면 좋은 봄들이, 나의 인생에는 많았다. 언젠가 이문세의 봄바람이란 노래가 한창 들려오던 봄도 있었다. 봄바람처럼 살랑, 날 꽃잎처럼 흔들던 사람, 귓가를 간지럽히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누군가와 광화문 스타벅스에서 마주 앉아 맞던 봄이 얼마나 눈부시고 소중한 봄이었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고. 한사코 가기 싫다던 엄마에게 저기 벚꽃도 펴있고 길이 정말 예뻐 엄마~ 하고 꼬셔서, 휠체어에 엄마를 태워 밀면서 혜화동 병원에서 성균관대 사이 주택가 골목길을 거닐던 봄도 그렇게 소중했던 봄인지 몰랐다. 철야 예배가 끝난 밤, 나 혼자서만 좋아하던 여자애가 포함된 그룹과 내심 그 애 생각하면서 내가 산 호두과자 간식 봉지를 들고 하나씩 돌려 먹으며 걷던, 짧고도 긴 윤중로를 빼곡한 사람들에 막혀 느릿느릿 걸으며 몽글몽글 터질듯 설레 하던 그 봄밤. 휘황찬란한 조명이 비추는 벚꽃잎들을 울렁울렁 올려다 보며 걷던 그 금요일 밤도 소중한 밤이었다.
생각해보면 삶의 대부분의 봄을 사랑 속에 파묻혀 보냈다. 사랑, 받거나, 사랑, 하거나. 모든 봄은 사랑 속에 있었다. 오직 사랑 속에 있었기에 봄은 정말 봄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봄. 아 내가 이렇게 벚꽃을 보게 되는구나- 이 봄엔. 하고 생각할 땐 아마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가장 사랑이 말라비틀어져 있는, 그런 봄임을 직감한 체념과 관조였다. 사실은 그렇게 생각할 여유도 없는 채로 뜻밖에 너무 일찍 핀 벚꽃을 무심히 보고 고개를 돌려 버렸던 것 같다. 정말이지 혼란과 괴로움에 파묻힌, 인생에서 가장 낯설고 날선 봄이다.
한편 가만히 가만히 생각해보자면. 내게는 아직 뜨끈한 사랑의 미열이 남아 있다. 엄마와, 또 하나님과, 선생님들이나 친구. 나를 지나간 사람들의 잊힌 사랑의 온기가 지금도 가슴을 데피고 있다. 그래서 희미하고 뿌옇게라도 벚꽃이 보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나의 계절은 아마도 11월 5일 정도. 나도 알 수 없다. 11월과 12월을 지나 1월과 2월을 넘길 수 있을지. 남은 생은 가을 가을 겨울 겨울일 것이 확실하다는 느낌으로만 가득하다. 이렇게 긴 겨울을 어떻게 살지? 막막하다. 봄은커녕 끝나지 않을 겨울에 들어선 것만 같다.
사랑이 없으면 봄이, 봄이 아니다. 하지만 사랑이 곧 봄이고, 봄은 곧 사랑의 증거니까, 사랑만 있으면 모든 계절이 봄이니까, 어쩌면 내게 남은 생의 계절을 봄봄봄봄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무한한 봄. 혼란과 난리 속에서도 고민하고 생각할 사랑이 내게는 있다. 감사한 부분이다. 사랑. 봄. 감사해야 할 사랑이 아직 너무 많이 있다. 그것을 따라가는 길이 너무 힘들지만. 봄이다. 안녕 봄. 영원한 겨울이자 영원한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