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고 부요하게

Less is more.

by jungsin



1: 글쓰기는 중요하다. 그것은 일종의, 세속 속의 성례 같은 것이다. 경건하게 자신의 생각을 적어나간다는 것은 살아있는 동안 하루 중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뜨겁고 거룩한 행동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니까 글쓰기는 지금, 내가 살아있다고 느끼게 하는 정말 몇 가지 안 되는 일로, 최소한의 의식이자, 기도이자, 절규나 발악이다.


2. 지금 영화 음악 라디오를 듣는데 디제이가 자신이 어떻게 영화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진솔한 고백을 늘어 놓는다. 형편이 어려워 지인의 집에 얹혀 살던 시절, 조용히 스윽 동시 상영으로 야한 영화를 보러 가곤 했다고 한다. 그때는 으레 동시상영으로 야한 외국 영화 한편, 한국영화 한편이 세트로 상영되었다고 한다. 예컨대 와일드 오키드가 끝나면 떡(영화 제목이었나 보다.)이 한다든지, 그렇게. 그런데 그런 날들이 이어지면서 한번씩 속아서 예술 영화를 보게 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취향의 방향이 조금씩 변했다고. 그렇게 B급 영화와 수준이 높은 영화를 가리지 않고 보다가, 마침내 영화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디제이는 그렇게, 무언가를 사랑하게 된 계기 치고는 부담스럽고 민망한 과정에 관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 놓았는데. 희안하게도 그 이야기를 들으며 정말 오랜만에, 내 안 어딘가에서 잔잔히 설레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다시 꿈이 살아나는 것만 같은(그렇지 않겠지만) 기분이 들었다.


지금은 성공한 라디오 피디이자 영화음악 프로그램 디제이가 된 그가 어려웠던 시절 가진 것도 하나 없이 주머니를 털어 야한 영화를 보러 가던 심경은 어떤 것이었을까. 멍하니 심야 극장을 향해 걸으며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곤 했을까. 별다른 꿈도 희망도 없이 어두캄캄한 곳에서 멍하니 민망한 장면들을 보면서, 스크린의 살색 빛이 푸석한 얼굴을 비추는 동안 침을 꿀꺽 꿀꺽 삼키며, 그는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렇게 인생이 메말라 비틀어졌던 시절에 그는 도대체 무엇을 꿈 꿨을까. 그러다가 어떻게 예술도 사랑하고 영화도 사랑하게 되었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너무 괴상하고 신비로운 일들이 아닌가.


3. 나를 추앙해. 나를 추앙해라니, 정말 인상적인 대사였다. 나의 해방일지를 좀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남자를 따라다니는 연기를 할 때 가장 빛났던 김지원이 또 그 애절하고 원망섞인 눈물 그렁한 눈빛으로 그렇게 말한다. 인생을 비관하며 소주만 마시는 남자에게, 나는 너무 마음이 허전해서 사랑하는 걸로는 모자르다고, 술 마시는 것 말고 내가 할 일 줄테니, 나를 추앙해달라고 한다. 먹먹한 소금끼를 머금은 언어가 날 잔잔하게 뒤흔들었다. 숨 막힐 정도로 문학적인 대사였다. 어떤 경험과 방황과 독서가 녹아 있으면 이런 대사를 쓸까. 정말 락스 냄새만 진동하는 실내 수영장 같은 대사만 봐서 드라마에 기대가 별로 없던 내게, 지중해가 있다고, 비릿한 냄새가 나는 세계가 있다고 고요히 속삭이는 모먼트 같았다.


4. 아무 것도 없다는 것. 그것이 흠모가 되는 마음을 아마 인생에서 처음으로 실감나게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얼마 전 오랜만에 만난 선교팀원이 내게 뭘 하고 싶은지 물어왔던 것 같은데, 그 순간 정말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한 가지 있었지만 그것은 차마 말을 할 수 없었고. 그동안 막연히 떠올랐던 작고 사소한 일들이 몇 가지가 있긴 했는데, 그중 하나가 한 1년 정도, 어디 한적한 곳에서 영화나 드라마나 건축, 패션, 문학 잡지 같은 것을 정주행하면서 푹 쉬면서 읽고 쓰면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었다.


아무것도 없이, 정말 아무것도 없이. 아무 목적도 꿈도 없이. 살아있는 일에만 집중하면서, 매일 새로운 이탈리아 요리나 스페인 요리 같은 것을 하나씩 연습해 보고, 쉬고, 걷고, 보고, 읽고, 먹고 씹고, 울고 웃으면서 한 몇 달 보내 본다면, 내 표정이나 눈빛이나 체형, 그리고 영혼은 어떻게 달라질까, 도인이 되어 있을까, 궁금하긴 했다. 정말로 아무것도 없이 단순한 일만 반복하면서 미친 사람처럼, 딱 한번만 살아보는 일이 인생에서 그렇게 힘든 일일까 그런 생각.


5. 나는 이즈음 가끔 영혼 없이 차에 실려 심방 사역에 동원되어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예배 때 간절한 마음에 사로잡혀 의자를 돌리고 무릎을 꿇고 의자에 엎드려 기도를 하다 난데없이 갑자기 쿨쿨 깊이 잠들기도 하고, 카페에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커피를 홀짝이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집안에서는 가족의 사업문제를 해결하는 일, 경매를 푸는 일, 상속 및 기타 비밀의 숲과 같은 문제로 끙끙 앓으며, 화장실과 깡생수와 웨하스에 요플레만으로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6. 카드지갑을 또 통째로 잃어버렸다. 종일 밥도 안 먹었는데 빨래방에서 건조 단계를 남겨놓고 그 사실을 알게 되어 다시 나가서 찾고 찾다가 포기하고 자전거에 무거운 옷가지 세 포대를 이고 비밀의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젖은 빨랫가지를 좁은 거실에 쏟아놓고 어지러운 방에 들어가 누워버렸다. 배고픈 건 그래도 괜찮았는데, 이렇게 매순간 계속 힘이 든 게 너무 힘들었다.


그리고,

엄마를 보러 가고 싶다. 정말 아무 생각도 안 나고 아무 것도 필요 없고 오직 엄마만 보고 싶다. 하나님의 말씀처럼 심령이 가난한 자는, 정말 복이 있는 것일까. 어떻게 복이 있는 걸까. 애통한 자에게 정말 위로가 있을까. 어떻게 있을까. 아무튼 가난하고 부요하게 지내보고 싶기는 하다. 그렇게밖에 지낼 힘이 없기도 하고. 두번째 소원은 살아있는 동안 제발 한번만 한가해졌으면. 영혼에 벚꽃잎 날리고 산들바람 부는 기분 한번만 느껴봤으면. 김지원의 대사처럼, 시간과 나 자신만 추앙하며 살아봤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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