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것들과 따듯한 것
수돗물 넣어도 되요?
난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질문을 했다. 수경 식물을 담은 유리병 속의 물을 갈 때 수돗물을 넣어도 괜찮은지, 어떤 물을 넣어야 할지 정말 궁금했다. 물이라 하면 정수, 지하수, 생수, 약수, 천연암반수도 있으니까. 꽃도 화분도 좋아는 했지만 한번도 사본 적은 없었으니까. 언제나 엄마가 가꾸었으니까. 엄마가 가꾸는 모습을 보긴 했지만. 내가 가꾸거나 물을 줄 생각은 하지도 못했으니까. 그러고 싶지도 않고, 그런 일은 하여튼 귀찮았으니까. 집은 내 마음대로 하는 곳이고, 그런 곳이어야 했으니까, 화분에 물을 주면 큰일이 나는 것이었다. 내 사랑의 세계는 그랬다. 못됐든 철 없었든 나의 충만한 세계는 그랬다.
비밀의 집에 제일 먼저 가져다 놓은 것은 커피와 핸드드립 종합 세트였다. 그 외 아무 관심도 없는 것들을 꾸역꾸역 하나씩 사놓았다. 사놓고 박스도 잘 뜯지도 않았고.
못하겠어요. 힘들어요.
나의 해방일지에서 김지원은 말한다. 모든 관계가 노동이에요. 눈 뜨고 있는 모든 시간이, 노동이에요. 직원들 대부분이 가입한 사내 동호회 가입 면담에서 낭독 동호회가 어떠냐며 피곤하게 종알거리는 상담원에게 말한다. 못하겠어요. 힘들어요.
그녀는 남자들에게 제대로 된 사랑 한번 못 받아보았고, 최근에 만난 남자에게는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서 돈을 빌려주었다가, 헤어지고 연락도 되지 않아 이별에 몰입할 수도 없이 감당하기 힘든 빚까지 떠앉게 생겼다. 자신만 뺀 온 세상이 에너지 넘치고 신나는 동호회 같았는지, 그녀는 눈물을 떠트리며 못하겠다고 말하고 만다.
이 분은 예쁜 거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꽃가게에서 화분을 고르고 있는데, 바로 옆 가게 부동산 아주머니가 말씀하신다. 맞아. 나, 예쁜 것만 찾지. 예쁜 거 좋아하는 사람이지. 그랬지. 그래서 아무리 황망해도 커피나 꽃은 있어야지, 굶어도 집에 꽃은 있어야지. 남자 혼자여도 좋은 냄새는 나야지. 꾸역꾸역 고집피웠지.
꽃집에 가자마자 눈에 띄는 연보라색 꽃이 있었는데. 여자 사장님이 추천해 준 두 개의 화분만 결국 사게 생겼었다. 아침부터 집안의 경매 문제를 풀겠다고 뛰어나온 바바리맨 같은 내 행색이나, 익스트림 심플 싱글맨 하우스의 문맥을 예상해 오래 사는 식물 두가지를 추천해준 것이다.
왜 내 인생은,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정말 사랑하는 것, 나에게 소중한 것은 귀신처럼 알아내서, 쏙 빼고 나를 타이르며, 이게 좋은 거야, 너한테는 이게 좋은 거야, 그렇게 늘 강요받으며 살아가게 될까. 가짜로, 그런 식으로. 진정한 것은 없고, 정말 소중한 것만 쏙 빼고 그럴듯하게 흘러갈까.
이 꽃은 왜 우리 동네에서만 인기가 없을까. 꽃가게 사장님이 말했다. 흐리멍텅한 눈빛으로 에이아이처럼 답했다. 예쁜데요? 선생님이 27번 부르면 네! 하고 답하듯이, 조건반사적으로. 거봐, 젊은 사람은 예쁜 거 알잖아요. 이 꽃이 원래 얼마나 예쁜 꽃인데. 사장님이 말씀하신 사시사철 아기자기한 연분홍색 꽃을 피우고 있는 이 화분도 좋고, 유리병에 담긴 그 옆의 진녹색 수경 식물도 좋았지만, 난 가게 유리문 밖에 놓여 있는 저 연보라빛 화분에서 눈길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난 저 꽃을 꼭 포함해서 사고 싶은데.
음.. 그럼 세 개 살까요..? 용기를 내어 말했다. 열정적으로 추천해주신 사장님의 기분도 안 상하게 해야 했고, 저 어여쁘고 가슴 시린 향기를 내는 연보라빛 꽃도 가져가야만 했다. 오늘 사지 않으면 마음에 쏙 들었던 통유리창 밖의 저 화분은 이제 또다시 내게서 떠나갈 것이었다. 포기 못하겠어요 사장님. 저 꽃을, 포기하지 못하겠어요.
묵직하게 결제했다. 집에서 모든 화분이 사라지고 처음 꽃이라구요. 처음 화분이라고요. 뜨거운 걸 삼키며 그럼 하나 더 살까요? 부드럽고 뜨겁게 말했다. 키우기 힘들든 말든. 물을 삼 일에 한번 줘야 하든 일주일에 한번 줘야 하든. 제가 사랑한다구요. 저에게 소중하다구요. 제발 저 좀 진정한 것 좀 바라보게 해주세요. 그리워하고 싶은 것 좀 그리워하게 해주세요.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를 순 없었으니까.
겨울. 겨울이 왔다. 새로운 봄이 왔지만 새로운 겨울이 왔다. 꽃이 피든 눈이 오든, 똑같고, 새로운 겨울인, 겨울뿐인 겨울이, 계속해서 새로운 겨울이 덮쳐오고 있다. 긴, 긴 겨울. 봄도 왔고 꽃화분도 있고 커피도 있지만 아무것도, 아무 봄도 봄이 아니다. 그래도 가능하면 그 언제보다 짧았으면 하는, 최소한의 희망을 품고 있는 겨울이다. 한 겨울 이불도 없이 찬 윗목에서 뒹굴며 말도 안 되는 너무 긴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