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냄새.

봄 냄새

by jungsin



나는 어떤 감각보다 냄새에 설렘을 느끼는 유형이다. 여전히 꽃 냄새에 설레곤 하는 것을 보면 내가 아직 생물인가 보다. 살아있나 보다. 아직은. 온 세상이 잿빛인데 꽃 냄새를 맡는 순간만큼은 파스텔 빛 설렘이 가슴을 쥐어짜 여전히 저릿하고 시리다.


또 뭐가 있을까 나를 설레게 하는 냄새는. 아침에 나는 커피 냄새, 아침에 골목 끝 콜럼비아 제과점에서 나는 우유 식빵 냄새, 우천시 취소 위기에 있던 소풍가는 날 비가 그친 뒤의 아침 냄새, 지금처럼 밤에 흩뿌린 비가 그친 뒤의 봄밤 비 냄새. 그런 것들에 난 뒤숭숭해 한다.


그것들은 공통적으로 이브의 느낌을 갖고 있다. 날 설레게 하는 것들은 하나같이 크리스마스 이브처럼 어떤 것의 이브의 느낌을 갖고 있다. 그럴 때에만 설렘의 조건이 갖춰지고, 또 그럴 때에만 설렘이 극대화되기도 한다.


가령 이런 것이다. 아직 커피가 추출되기 전 커피 원두가 갈아질 때 나는 짙고 가슴 시린 과일향과 흙 냄새가 베인 원두 냄새, 소풍은 아직 떠나지도 않았는데 소풍날 아침에 비가 그친 집 앞 흙에서 이미 맡을 수 있는 소풍 냄새, 아침 잠결에 엄마가 싸고 있는 김밥 냄새, 습도도 자욱하고 공기 입자의 밀도가 높은 봄밤, 봄밤비 냄새를 맡으며 걷는데 여자 화장 용품이 살에 베여 나오는, 모르는 여자의 스쳐 지나가는 화장품 냄새 같은 것이 미지의 설렘을 불러 일으킨다.


쓰다보니 나는 봄과 아침에 설렘을 느끼는 사람임이 선명히 드러난다. 역시 모두 Before something의 성질을 가진다. 봄은 뜨겁고 긴 여름이 오기 전 오묘하고 신비로운 온도와 날씨를 품고 있는 짧은 계절이고, 아침은 강렬하고 긴 낮이 오기 전 잠깐 찾아오는 설렘이다.


지하철에서 내리면서 무심코 스쳐 보고, 부사 같기도 하고 풋사과같기도 한 달큰한 존재의 인기척을 느끼며 두번째 보는데 긴 파마머리에 기운데 가르마를 한 여자의 표정이 흐뭇해 보인다. 사람도 꽃처럼, 태양열 에너지 판처럼 시선을 받고 관심을 받을 때 힘을 얻는, 가녀린 결핍의 존재 같다는 생각을 했다. 시선도 힘이고 에너지인 것이다. 그 사람이 나의 시선을 가져가는 찰나에 씨익 밝아지는 모습을 보면서, 그것이 온당하고 건강한 사랑이라면 사랑받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편 내 편에서, 어떤 따듯한 분위기로 시선을 빼앗는 이성의 느낌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늘 궁금했다. 하여 친한 형제 지인들과 집요하게 대화하곤 했다. 십대나 이십대라면 그런 생각도 하지 않고 그 느낌에 빠져 허우적거렸을테지만, 여전히 하우적거릴 여지는 있을지라도, 이제 의미를 생각할만큼은 여유로워진 것이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의 노스탤지어는 무엇일까, 그런 이야기는 언제 해도 재미있게 바로 집중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이러면 안된다고, 남자들끼리 몰려다니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면 안 생긴다고 하지만, 난 무언가의 전인 그런 시간들이 너무 즐겁고, 사실 퍽 만족스럽다.


여기서 ‘우리들’의 공통점도 아직 여자를 모르는 싱글이었다는 점이다. 봄이나 아침이나 원두 그라인딩 냄새나 이브처럼 우린 아직 여름이 오지 않았고, 낮이 되지 않았고, 추출되어 맛의 진이 다 빠진 원두 방향제가 되지 않았고, 크리스마스가 되지 않았기에 우리가 설레는 것에 대해서 설레하며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연애의 호시절을 생각할 때 이상하리만치 스무살 때 잠깐 사귀었을 뿐인 애가 떠오르는 것도 비슷한 연유일지 모르겠다. 그 여자애는 어쩌면 이제 나에게 ‘여자’의 이데아로 남아 버릴지도 모르겠다. 그 애와의 서툴렀던 스물 봄의 시간들이 연애의 석고상처럼 남을 줄 그때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커피, 봄, 꽃, 소풍, 마셔버리고, 뜨거워져버리고, 가져버리고, 꺾어버리고, 놀아버리면 모두 끝나버리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이렇게 거리를 두고, 아직 오지 않고, 꺾지 않고, 냄새만 맡을 수 있을 뿐인 때가 가장 설레고 가슴 시린 때이다.


엄마 옷에서 아직도 엄마 냄새가 난다. 엄마의 블라우스 몇개를 비밀의 집에 가져다 두고 옷을 갈아입을 때나, 그냥 많이 힘이 들 때 킁킁 한번씩 엄마 냄새를 맡곤 한다. 마치 현관에 신발을 벗어놓고 삐그덕거리는 마루를 밟고 집에 들어가듯이 담담하게, 무심하게. 식당에서 밥한번 사준 적 없었고 여행 한번 같이 간 적 없었는데. 엄마와의 호시절은 지나간 것이 아니라, 아직 다가오지 않은 것이기에, 아직 만나지 않은 영원한 시간을 기다리는 봄이기에. 나는 엄마 냄새를 맡으면서 설렌다.


써보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그런 것들을 정말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이렇게 끝나버리면 가장 좋다. 뜨거운 여름이 오면 오히려 맥이 빠질것만 같다. 봄은 이렇게 짧고 향긋해서 아름답고 시리는데. 딱 이렇게까지가 좋다. 여름도 가을도 겨울도, 어느 계절도 봄같은 계절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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