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듣지 않는다. 십 분이라도 안 들으면 죽을 것처럼 그렇게 끼고 살던 음악을 듣지 않는다. 침묵을 느낀다. 침묵할 뿐 아니라, 그것을 느낀다. 가만히 앉아 모든 것을 느낀다. 텅빈 로비에 혼자 앉아, 아무 채도 하지 않고 이렇게 가만히 가만히, 있어, 본다.
지하철에서 내려 약간의 숨가쁨을 느끼며 걸어 올라간다. 아무 허덕임도 없이. 잘 알던 그 길을 따라, 다시 그 세계로 미끄러져 들어가 본다. 기분 좋게 차오르는 숨결. 심호흡. 이 심호흡마저도 익숙하다. 너무나 익숙한 숨결과 설렘이다. 여름 풀잎의 초록 내음이 섞인 저녁 냄새. 교정의 나무 아래 돌의자에 모여 앉아, 무언가 정답게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들. 어스름한 저녁 하늘빛. 모든 것들이 외갓집 시골 부엌에서 새어 나오는 냄새처럼 익숙하고, 잔잔하고, 벅차다
시간이 멈춰버리고, 내 세계가 멈춰버리고, 우주가 얼어붙고. 그리고는 처음으로 와보는 길이다. 도서관으로 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조만식 기념관으로 들어가 본다. 설렘과 호기로움으로 감사히 공부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건물. 떨리는 마음으로 걸어 올라가던 계단과 복도. 그대로 있는 3층 남자 화장실 안의 그 고요. 정말 모든 것들이 익숙하다. 줄지어 붙어 있는 강의실들을 지나서 건물을 나가, 웨스트민스터 관 4층으로 걸어 올라간다. 인적 없는 토요일의 웨민홀 안. 아주 작은 기계음만 들린다. 변함없이 그 자리에 놓여 있는, 허리까지만 받혀주는 연두색 소파.
오븐에 구워지고 있는 이스트 빵처럼 부풀어 올라있던 시간들이었다. 꽉 차게 꿈꾸고, 꽉 차게 슬퍼하고, 꽉 차게 초조해 하고, 꽉 차게 졸고, 꽉 차게 꿈꾸며 보내던 시간이었다. 햇빛과 달빛이 포개어진 빛이 따듯하게 품고 있는 초저녁 캠퍼스를, 그때의 발걸음처럼 걸어 본다. 걸음과, 맥박과, 꿈이 이클립스된다. 놀라 굳어 있던 마음들이, 머리를 파묻고 웅크려 앉아있던 감정들이, 살며시 고개를 든다. 그때의 꿈같던 시간들이 아직 이 캠퍼스에는 그대로 놓여 있다.
어쩌면 모두 꿈이었을까. 아니면 이 삶이, 이 전체가 꿈일까. 나는 어떻게 이렇게 가난해졌을까. 작은 것들에 힘들어하고, 다시 작은 것들에 채워지고. 거지처럼 의존하고, 매달리고, 안달하고, 한숨짓고, 기뻐하다가 또 슬퍼하다가, 배불러하다가 또 배고파하는. 어쩌다가 내가 이렇게 작은 것에도 아파하는, 유약한 사람이 되었을까. 다시 나로서 가득찰 순 없을까, 이제는. 모두 끝나버린 것일까. 꿈이나 힘이나 설렘, 그런 것을 영혼에 가득 머금고 있는 사람, 누군가에게 그 자체로 꿈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내 안에서 다 증발되어 버린 것일까, 이제는.
왜 이렇게 나는 작아져 있었을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딱 한 번만, 다시 큰 꿈들을 꾸고, 다시 한번만 강해져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에도 매달리지 않고, 깊고 그윽한 눈빛을 되찾고, 누군가에게 존재 자체만으로 위로가 되어 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는 일. 그걸 해보고 싶다. 그것만 딱 한 번, 간결하게 해보고 싶다.
새까맣게 아득한 세계가 있고, 까만 세상 어딘가에 여름의 초록 저녁 같은 꿈이 있는데. 보물찾기 같은 그 꿈을 잡으러 폴짝 뛰어오를 힘이 없다. 그래도 한번 걸어 들어가는 봐야지. 어떤 절박함 속으로. 정말 진지한 자리로 걸어 들어가 보기는 해야지. 다시 한번 도서관에 가봐야지. 꿈이나 어둠이나, 숨결, 그 속에 처박혀 봐야지. 섣불리 나가지 말아야지. 벚꽃잎 위에 앉은, 나른한 4월의 봄 햇볕 같은 열기가 식고 시원한 여름 바람이 불 때까지 한 발짝도 나오지 말아야지.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무언가에 바빠 정신없이 또 빠져들고 뛰어다니던, 나의 그런 시간들이, 생에서 가장 뜨겁고 아팠던 한 계절이 어쩌면 지나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달가워 할 수도 반길 수도 없는 선선한 여름 바람이 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