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때문이다. 우리가 분위기 좋고 한적한 카페를 좋아하는 이유는 다 어떤 그리움 때문이다. 그리움은 어떤 목마름일 텐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의 목마름이란 크게 두 가지 종류의 목마름으로 나뉠 수 있을 것 같다. 쉼에 대한 목마름, 그리고 설렘에 대한 목마름.
이 두 가지 목마름 모두 사람의 생명성과 관련이 있는 것들이다. 흔한 표현으로는 인격성, 더 명확한 표현으로는, 사랑이라는 단어로 대체될 수도 있다. 쉼이든 설렘이든 다 사랑에 기대 있어, 그것에 애처롭게 매달려 있고, 그것을 간절히 목말라 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쉼은 사랑도 사람도 없이, 홀로는 온전해지기도, 어쩌면 애초 존재하기도 불가능한 것이다.
쉼의 본질은 무엇일까. 너구리나 귀뚜라미에게는 모르겠지만 사람에게 쉼의 본질은 사람이다. 사람에게 있어 사람은 피곤함의 근원적인 이유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가장 궁극적인 쉼 역시 우리는 오직 사람에게서 얻을 수 있을 뿐이다. 피곤함의 원인은 격무라거나 자신의 욕망이 될 수도, 사람 외에도 여러가지가 있을텐데, 쉼은 오직 사람의 곁에서 얻을 수 있다. 완벽한 쉼은 사람이 있는 곳에서만 가능하다.
아이가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라. 쌔근쌔근 잠들어있는 아이는, 비록 홀로 아이방 작은 베갯잇에 자그마한 머리를 기대어 뉘어 있을지라도, 오 자 모양을 하고 오물거리는 아이의 입모양을 가만히 보면 그는 지금도 꿈속에서 엄마의 젖을 물고 있다. 그의 마음과 영혼은 엄마 품에 안겨 고요히 잠들던 순간과도 같이 여전히 부엌에서 쌀을 씻고 있는 엄마의 젖가슴에 파묻혀 있다.
쉼은 인격의 숨(인격의 숨쉼)을 담보로 한다. 그러니까, 인격의 숨쉼은 특히, 여성성 혹은 모성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는 모성애에 목이 말라 있다. 어린 시절, 앞에 마당이 탁 트인 툇마루나 건너방에서 눈가에 울다 만(운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위로가 어떻게 있었는가가 모든 울었던 이유를 덮어버리곤 하니까.), 소금기 벤 눈물자욱을 하고서 누군가의 넓적다리에 곤히 기대어 잠들곤 했던 노스탤지어의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누군가의 성은 필시 여자였으리라. 우리에게는 참외와 자두처럼 시큼달큼한 여름날의 낮잠의 기억이 있다. 외할머니와 엄마와 심지어 옆집 아줌마(이상하게 아빠는 아닌데 왜 그런지.)의 무릎이나, 넓적다리에 머리를 베고 누워서, 솔솔 마당에서 불어와 볼을 스치고 지나가는 달큼한 바람을 맞으며, 혹은 엄마나 외할머니가 부쳐주는 솔솔 부채 바람을 맞으며 깊이 잠들었던 여름날의 기억이 있다. 그때의 잠을 침대는 과학이라는 에이스 침대에서의 잠과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
사람은 사람에 기대어 쉰다. 우리는 사람의 넓적다리와 팔뚝과 어깨와 등에 기대어 쉰다. 그것들이 없어도 쉴 수는 있지만 사람이 없는 쉼이란 어딘지 허무하고, 어딘지 기괴한 쉼이다. 어딘가 불편하고 씁쓸한, 기계적인 쉼. 두 말할 나위 없이 우리는 사람에, 사랑에, 사람의 사랑에 기대어 쉴 때 정말 쉴 수 있을 뿐이다.
설렘은 어떠한가. 살아있는 설렘은 근원적으로 인격에 의지한다. 한우와 양념 게장에 설레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다. 우리에게 있어 진정한 설렘은 오직 사람(또는 인격성을 가진 하나님)에 대한 설렘일 뿐이다. 카페의 본질도 그런 연유에서 사람이다. 원래 카페는 공무원 시대나 바이러스 시대의 유행처럼, 혼자 카공을 하거너 온라인 미팅의 전자 패널을 통해 사람이 아닌, 사람의 상spectrum을 보며 지적인 정보를 교류하고 가짜 인격성에서 차선의 위로를 공유하는 곳이 아니었다. 80년대까지의 다방도 그런 적이 없었고, 90년대의 커피숍도 그런 곳이었던 적이 없었다.
카페는 거의 만남의 장소일 뿐이었다. 사람을 위해 커피를 좀 짓누르자면 커피는 거들뿐 커피는 언제나 사람을 위해 존재했다. 우리에게는 커피 맛집이라는 것이 없었다. 누군가를 단정하게 집중해서 볼 곳이 없어서 만나는 곳이 하필 하찮은 카페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직접 누군가를 카페에서 만나는 것이다. 만나기 위해 기다리며 설레 하고 잠시 화장실에 들려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것이다. 그의 눈을 보고 그의 목소리를 듣고, 그가 꾸민 옷차림과 눈썹과 목덜미와 이마와 발목을 보고, 그의 은은한 체취를 느끼며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한적한 카페를 찾아가고, 카페의 소파에 앉아 연신 커피를 홀짝이며 여전히 계속해서 누군가를,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그리움이 궁극적으로 예쁘고 팬시한 공간 자체를 향하고 있을 리는 없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외로움에 무기력해진, 더 이상 사람에 대한 기대를 잃어버린 고독한 커피 애호가, 또는 공간 변태, 또는 삶이나 사람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버린 무기력한 도시 낭인일 것이다. 그렇게 왜곡되고 뒤틀려진 사람도 카페를 좋아할 수는 있지만, 그는 카페의 참맛을 알고 있는 사람일 리 없다. 그는 커피 맛도 진정하게는 잘 모르고 있을 것이다. 커피맛의 진가란 실은 사람을 마주하고 있을 때 무한하게 곱해지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 출근길에 에스프레소 바가 밖을 향해 나 있는 작고 아담한 카페에 들러, 에스프레소 바 앞에 서서 에스프레소를 원샷에 들이키는 루틴을 건너뛰면 하루가 허전한 이탈리안. 땀 흘려 일하는 틈에 믹스 커피 두 개를 붓고 봉지로 휘휘 저어 후후 불면서 마시지 않고는 힘이 나지 않는 노동자. 모두 실은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설렘에 대한 그리움. 쉼에 대한 그리움. 사람에 대한 그리움, 사람의, 사랑에 대한 그리움. 그러니까 그것의 다른 이름이 그럴싸해 보이는 Cafe인 것이다. 우리 영혼이 그렇게 아프고 핍절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