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내가 속한 곳에서 사역이란 단어를 정말 많이 쓰고 많이 듣는다. 사역이란 어떤 뜻을 가진 것일까. 그것의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
사역은 한자어로 일 사, 부릴 역으로써 한 사전에서는 사역을 기독교(천주교) 용어로써 “하느님이 행하여 이룸.”이라고 정의하고 있으며, 동의어로는 “역사”라고 표기한다(순서만 바꿔서 동일한 한자다.). 교회에서 흔히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라고 말할 때의 그 역사일 터다. 그러니까, 사역을 거꾸로 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사역은 역사와 거의 동의어라는 점에 우선 밑줄을 긋는다.
어쨌든 그것은 한자어 의미처럼 어떤 ‘일’을 의미한다. 영어로는 ministry다. ministry는 mini+stry로써 stry는 명사형 어미이고 주요 어원은 mini다. 왜 사역의 어원에 mini, ‘작은’이 핵심 의미로 들어가게 된 것인지, 유래는 찾지 못했고(매우 궁금하다.), 이런 경우에는 해석상 상상의 여지가 조심스레 어느 정도 열려 있다고 보고(주인 없는 어원이라면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허락되어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억지스러운 관점에서.), 우선 문자 그대로 보자면 이렇게 볼 수도 있겠다. 일은 일인데, 말 그대로 ‘작은’ 일이라고.
검색해보니 사역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디아코니아(봉사)’인 모양이다. (나는 헬라어를 모른다.) 한 목사님이 블로그에 올린 설교 원고에 따르면, 디아코니아는 봉사(사역)일뿐 아니라 집사라는 뜻도 갖고 있으며, 따라서 “사역은 '목사'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주어진 은사를 활용하여 감당해야 할 의무”라고 말한다.
정리하면 국어사전의 정의에 따라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고, 영어 어원에 의하면 ‘작은’ 것이고, 헬라어 정의에 의하면 교역자(목사, 전도사)만의 것이 아닌 서브 리더들(평신도들)에게도 동일하게 맡겨진 일이다. 이 의미들을 합성해보자면 ‘(거의) 모든 성도가 하는 작은 일로써, 그러나 (사람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인 것.’.
B
교회의 사역도 누군가를 만나는 일처럼 결과에 집착하는 것보다 그 지난한 과정에 몰두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 다시 말해 일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고 순조로운 흐름이 있어야 한다. 연애든 사역이든 모두, 그것들의 본질적 성격상 경직된 부담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를 사귀듯이 자연스러워야 하며, 결과는 아예 내다볼 생각도 하디 말아야 한다.
(이 메모는 authentic하고 본래적인 사역의 의미를 더듬어 찾아보고 싶어서 쓴 글인데,) 사역은 특정한 리더들이 도맡아서 구별된 책임감을 가지고 해야 하는 일도 아니고, 선민의식(나는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어 선택된 특별한 사람이라는 의식)과도 같은 자기중심적인 흥분된 아이디어를 가지고 혼자 또는 특별한 몇몇이 특별한 부담을 가지고 독점해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되며, 더욱이 그것은 처음부터 인간의 것이 아니다. 애당초 하나님의 일이며, 그것의 알파(시작)도 오메가(끝)도 오롯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철저하고 완벽하게, 온전한 당신의 일이라고 해석될 여지가 충분히 있을 수 있겠다.
C
이러한 맥락에서 이에 더해 나의 주장을 조금 더 가미하자면 이러한 면면들이 더 고려될 수 있다.
1) ministry에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앞섬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누군가는 뒤서게 된다. 심지어 하나님도 소외될 수 있으며, 교회와 리더의 사역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갖지 못한 누군가는 마지못해 끌려가거나, 마침내 그도 하나님과 함께 ‘그’ 사역(‘a’ ministry)에서 소외될 수 있다.
하나님의 사역, 혹은 하나님의 역사는 진리가 그러한 것이듯 불변하는 하나의 것이지만, 그것에 대한 개인의 이해는 현실적이거나 기질적이거나 성경과 신앙을 이해하는 해석적 개성이 다른 이유 등으로 인해 조금씩 다르거나, 어떤 식으로든 뒤틀려 있을 수가 있다. 실제로 교단이나 교회마다, 선교 단체마다, 개인마다 보통은 조금씩 혹은 많이 다른 것이 현실이다.
네비게이토, CCC, ivf, CAM, 장로교, 기하성, 한신 등, 그들의 정체성의 근간을 이루는 경험과 공동체의 히스토리가 다를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라 사역적 가치관, 비전의 방향이 조금씩 다 달라지게 될 수밖에 앖었다. 이와 같이 성도 개인도 개인마다 다양한 경험의 영향 아래에 있을 수밖에 없고, 그가 속한 교회와 선교단체의 뒤엉킨 히스토리의 지배도 받는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현실적이고 신앙적인 이해와 고려 없이 리더가 구성원들의 멱살을 잡고 끌고 가는 공동체는 한 마음이 되기 어렵다. 구성원은 사역에 대해 주인의식을 가지기 어렵고, 이제 그에게는 더 이상 자기의 일도 하나님의 일도 아니어서, 재미도 의미도 없어지게 된다. 따라서 교회의 사역은 일방적이어서는 안 되고, 최대한 모든 구성원들 사이에서 충분한 대화를 거쳐 서로가 서로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신실한 노력을 거쳐야 하며, 이견이 있는 부분은 최대한 신학(특히 성서신학)적 검증과 설득의 과정까지 기꺼이 필요로 하는 바, 그것은 어떤 관점에서는 구성원들에게 고도의 관계 능력과, 갈등의 정도에 따라 자기 부인의 마음가짐을 필요로 하는, 희생적 소통의 과정에 기꺼이 참여할 의지까지를 요구한다. 그 길을 에둘러 가거나, 까다롭게 느껴지는 과정들을 간편하게 생략하면 한 몸이 되기 어렵고, 그런 공동체의 사역은 모레 위에 지은 성과 같다.
2) 그것은 위대한 일이지만, 한편 그 일은 작은(mini) 것(stry)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그것에 참여할 수 있는 우리의 자리가 너무나 작기 때문이다. 큰 사역자, 위대한 사역자란 없다.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만 있을 뿐이다.
3) 사역에는 공동의 고백의 차원과 개인적 고백의 차원이 있다. 공동의 고백이란 이런 것이다. 우리에게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써 책임이자 본분이며, 그것을 할 수 있는 모든 이에게 그것은 예외 없이 요구되는 일이라는 점. 또한 그것은 human-centered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 따라서 그 일에는 애달픈 하나님의 마음 이상의 감정이 일체 첨가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즉 성취감이나 패배감을 가질 필요가 없으며, 과도한 책임감이나 죄책감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한 감정들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그가 하나님의 일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일로써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이 앞서는 사역은 미시오 휴먼(사람의 선교), 미시오 에클레시아(교회의 선교)일 수는 있어도 missio Dei (하나님의 선교)는 아닐 것이다.
개인 고백의 차원은 1)의 두 번째 문단에서 간략히 언급했다.
일단 여기까지 사역에 대한 소고랄까, 그런 것의 심히 어설픈 preface였고, 계속해서 공부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면서 연재해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