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머물고 있는 곳에 언제부턴가 연한 적갈색의 작은 개미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들은 놀랍도록 빠르다. 혼자서 거닐 때는 똑바로 빠르게 달려 나가다가도, 내 눈에 들어오면 마치 내가 자신을 발견한 것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매우 흥분하며 불규칙하고 혼란스러운 움직임으로 동선을 흐트러트리면서 나와 모종의 대치극을 벌인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나 작다. 개미의 몸을 지그시 누르려는 내 거대한 손가락에 비해, 나를 피해 숨으려는 그들의 움직임은 너무나 무력한 것이다. 난 개미들을 검지 손가락으로 살짝 눌러서(작은 개미의 끈적끈적한 몸이 내 검지 손가락에 붙을 정도로만) 개미를 눌러 붙인 손가락의 안쪽을 하늘로 향하게 해서 개미에게서(개미가 내 손 안에서 기어 다니거나, 손가락에 그대로 붙어 있는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화장실 창을 열고 후 그를 후 불어서 창밖으로 날아가게 한다. 언제나 그런 방식으로 그들을 대한다.
언제부턴가 나는 벌레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한 번은 누군가의 집에 가서 청소를 하다가, 일행이었던 여자분이 검고 진한 바퀴벌레를 발견하고 나에게 처치해 달라고 했었다. 나는 바퀴벌레를 죽이지 않고 둘둘 말은 휴지 뭉탱이로 이불처럼 살짝 싸서 버리려고 했다. 그러자 그 여자분이 인상을 찌푸리며 약간의 분노와 짜증을 감추지 못하고 그러면 안 된다고, 그냥 죽여서 버려달라고 부탁했다(그녀로서는 그녀의 독특하고 공포스러운 경험과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누가 연약한 여자고 누가 강인한 남자인지 그 순간 잠깐 헷갈려서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녀의 말을 듣지 않으면 우리의 관계에 심각한 갈등이 생기리라는 것을 충분히 직감할 수 있었다. 즉각 수긍하는 모습을 보여야만 했다.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비밀이다. 그가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
사실 살면서 벌레를 한 마리도 죽이지 않고 살 수는 없다. 등산이라도 한번 하다 보면 운동화 바닥에 개미 몇 마리쯤 짓밟혀 죽는 일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여름이면 내 팔뚝과 종아리에서 피를 빨아먹는 모기를 발견하고, 그들이 식사를 다 마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을 만큼 내가 그들에게 관대해질 수 있는 것도, 벌레가 나를 무는 감각에 대한 나의 인내심이 그만큼 강한 것도 아니다. 내가 앞으로 얼마를 더 살지는 모르지만 살아있는 동안 나는 앞으로도 그들의 미래를 짓밟아야만 할 것이다.
어렸을 때는 잠자리는 햇빛을 정면으로 보면 눈이 캄캄해져서 움직이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주워듣고, 잠자리의 날개를 붙여 검지와 중지 손가락 사이에 넣고 잠자리를 꾹 잡고서는, 거꾸로 뒤집어 한참을 뜨거운 태양을 바라보게 만들거나(정말 잔인한 행동이었다), 잠자리의 날개를 찢어서, 아니 뜯어서, 들판에 내던져 버리고 잠자리가 어떻게 하는지 빤히 관찰하곤 했을 만큼 잔혹하고 호기심 많은 개구쟁이였다. 그러면서 약간은 기분이 이상하기는(아마도 죄책감이었을 것이다) 했지만, 당연히 나 자신에게서 윤리적인 문제를 느낄 만큼 자책하고 괴로워하지는 않았다. 그것들은 소년에게 허락된 놀이라고 여겼다.
같은 전공자들과 함께 하는 모임에서 이런저런 외국 조직신학 책들을 들쳐보곤 하다가 부지불식간에 언듯 접한 생태신학(지구의 생태계 전체가 하나님의 피조 세계이므로,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깊은 경외감과 책임감으로 생명과 자연을 대하는 신학적 아이디어랄까.)의 영향을 너무 순수하게 이상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아니면 이것도 하나의 강박적인 마음 때문인지, 인성적으로 성숙해져서 벌레도 죽이지 못할 정도로 생명을 존중하게 된 것인지, 그저 나이가 들면서 여성 호르몬이 과다 분비가 된 건지, 혹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트라우마가 생겨서 마음이 약해진 것인지, 이것들 중 두 가지 이상의 원인이 뒤섞인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나는 벌레를 잘, 죽이지 못한다.
이러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을 나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며, 나는 나 자신을 어떻게 보아주어야 할까. 이러한 문제를 늘 좀 생각해보고 싶었는데, 바로 마음에 관한 것이다.
내 안에 있는 나의 마음을 나도 잘 모른다. 내 안에서 그 자체로 생명처럼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마음의 기원이나 성격에 대해 아직 거의 아무 이해도 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리고 우리 모두는 서로의 마음과 존재를 도덕적 가치라든지 신앙생활의 규범이나 사회 문화적 기준 같은 것으로 너무나도 쉽게 빗금치곤 한다. 자신의 마음의 세계에, 그리고 서로의 마음속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인가를 아무 규범적인 방해도 받지 않고 자유로운 상상력을 가지고 진지하게 이해하려 하기보다, 먼저 제단사처럼 줄자를 가져다 대고, 검열하고, 짓누른다. 그게 우리 사이에, 나와 나 자신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등산을 하면서 살아있는 개미를 밟지 않을 수 없듯이, 얽히고 뒤섥힌 거미줄 같은 관계 속에서 그런 경험들을 피할 수는 없다. 나 자신도 내 마음을 자꾸만 억압하고 검열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경험들이 나아지지는 않고, 계속 반복되고, 점점 더 짙어져 가면서, 내 삶 자체에 더욱 독특하게 더욱 깊숙이 들어오곤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따라서 나는 관계의 궁극적인 의미에 대해, 개인과 관계 속에서 용트림하듯, 그 자체로 생명처럼 움직이는 마음과 그것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 그것들과는 정 반대에 서있는 어떤 규범들에 대해, 또 내가 관심을 갖는 기독교 사역에 대해 질문을 던져야 했고, 그것들을 풀어 나가는 방식이 훨씬 더 진지하고 포용적이고 사려 깊고 존재적인 것이어야 함을 고민하면서 깨달을 수 있었다.
한낱 미물이라 불리는 벌레의 생명도 신비롭도 존귀한 것일진대 천사도 질투한다는 인간을 대할 때, 그리고 인간의 결정적 자리인 ‘마음(또는 더 깊이는 영혼)’이라는 세계를 대할 때 얼마나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서로에게, 우리는 얼마나 오만하고, 때로는 거만한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것인지, 나는 새삼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 겸손하고 진지해지고 싶었다. 적어도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존재는 개미 한 마리쯤 밟아 죽여도 된다는 생각처럼, 그렇게 선명하고 단순한 것은 아닐 테니까.
그것을 내가 관심 갖는 기독교 분야의 신학적 눈으로 바라보자면 종교의 비인간화, 사역의 비존재화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이러한 고민이 없는 사역자는 반절의 사역자일 것이다. 연인이라면 반절의 남자친구, 친구라면 반절의 친구. 그러나 가장 두렵고 끔찍한 것은, ‘사람’으로써 반절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생각들은 궁극적으로 온전한 사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고민까지 닿아야 하고, 결국은 관계 속에서 깊어지며 검증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러니까, 나 자신도 인정할 수 있고 사람들도 모두 느낄 수 있는 성숙한 아름다움으로 무르익는 일과 같은 것. 정말 상처받은 사람들이 기대 쉴 수 있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가는 일. 한 치도 속일 수 없는 정직한, ‘사람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일. 그처럼 두렵고도 신비로운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이 동동거리는 마음을 좀 내려놓고 다시 누군가의 팔베개에 기대 쉬고 싶기도 하다. 정말 그렇다. 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