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 쓰다 만 글

by jungsin



지금까지, 나의 글쓰기는 나를 밖으로 꺼내는 일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기술을 기르는 일기도 했고. 정리하고 수납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었다. 문득 마음속에 깊이 다가온 감상이 있었거나 홀연히 하고 싶은 말이 떠올랐을 때 그것을 문자로 표현하는 기술을 단련했던 것이었다. 시골 부뚜막에서 피어오르는 굴뚝 연기처럼 어지럽게 피어오르는 생각들을 작은 주먹으로 한 움큼씩 붙잡아서 내 책상 속 서랍에 하나씩 담아놓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나를 궁극적으로 어떻게 변화시키고 성장시킬 수 있는가 하는 지점에서 나는 막혀 있었다. 글쓰기와 존재적 성숙 사이에는 너무나 큰 강이 있는 것 같았다. 막막하고 묘연했다. 이 일은 어쩌면 나를 한 치도 성장시킬 수 없을 것만 같아 조급한 마음이 들곤 했다.


피아니스트가 매일 여덟 시간씩 연주 연습을 한다면 그는 머지않아 곧, 악보를 읽고 악보에 따라 연주를 하는 기술에 능숙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가 늘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 속 동요 악보나 바이엘과 체르니 악보만 보고 연주한다면 그는 늘 그 수준의 연주만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피아니스트는 고전의 역사 속에서 지금도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한 숨을 쉬고 있는 바흐와 베토벤을 만나야 한다. 한 피아니스트의 생에 있어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 되는 때는 어쩌면 음악가와의 만남의 순간일 것이다. 기술적으로 어렵다는 쇼팽의 발라드 no. 1 같은 어려운 곡을 아무리 연습하더라도, 그가 쇼팽의 숨결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의 연주는 기술적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아름다운 피아니스트는, 음악가의 삶과 자신의 삶을 접붙여 새롭게 곡을 해석할 수 있는 깊이 있는 상상력을 길러야 한다는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누구든지 정말 좋은 피아니스트가 되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피아노 앞에만 머물러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는 자기 안에서 어떤 압박을 받을 것이다. 낯선 곳으로 떠나는 여행도 서슴없이 감행해야 하고, 눈물을 짜는 연애도 하고, 건축과 요리 같은 그동안 읽어보지 않은 전혀 새로운 분야의 독서에도 골몰히 잠겨야 한다는, 강렬한 자기 압박 같은 것이다. 그 길의 어느 끝에서는 몇 일이고 몇 달이고 도서관의 한 구석에 틀어박혀 앉아 도시락을 먹으며, 쇼팽의 전기를 읽고 쇼팽에 관한 다양한 저널리즘과 에세이를 읽고, 쇼팽을 만나야 했을 것이다.


피아니스트가 아무리 무수한 연습을 해서 악보대로 똑같이 연주할 수 있는 피아노 실력이 있더라도, 곡에 숨결을 불어넣을 수 있는 영감이 없다면 그의 연주는 우리의 영혼을 파고드는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책을 읽는 것은 글쓰기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써, 내 밖의 세상에서 원래부터 영원히 존재했던 음표를 하나하나 차곡차곡 내 안으로 담아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새로운 악보를 만드는 일이다. 그렇게 새로운 음악을 만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극받아야 하며, 그러한 맥락에서 그는 새로운 작가나 유명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나 수십수백 년 전 작가의 고전을 읽아냐 한다는 충동과 유혹에 끊임없이 시달릴 것이다. 그 모든 일이 그의 영혼에 숨결을 불어넣는 일이 될 것이다. 이 멃은 우주에서 단 한 사람만 칠 수 있는, 하나의 고유하고 독특한 연주가 잉태되고 있는 것이다.


나의 글쓰기는 이제 조금 다른 방향과 국면으로 변화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 나는 새로운 여행을 떠나야 한다. 만남이든 대화든, 예배이든 기도이든, 연애든 책이든 여행이든 테니스든 무엇이든 말이다.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 여전히 아직 너무나 미숙한. 이토록 불완전하고 어지러운. 나의 시간은 그러니까 아직 한 페이지도 다 넘기지 못한. 채, 쓰다 만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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