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주비행사.
오후 네 시에 한 번, 다섯 시에 한 번. h 목사님께서 두 번이나 전화를 주셨었다. 리턴콜을 해드렸다. ‘j도사, 어디에요? 그 L 신학대학원 지원은 어떻게 되고 있는지 궁금해서 전화를 했더니, 왜 그렇게 전화가 안 돼요?’
L 대학원은 목사님이 수년 전부터 나에게 입학을 권면하셨었던 곳이다. 최근 지금 속해 있는 교회에서 나는 좀 본질적인 문제로 생각이 깊어지고 있었다. 비전에 대한 문제로 혼자 고민하며 엷은 속앓이를 해오다가 문득 L 신대원 홈페이지에 들어가 입학 일정을 찾아 보았더니 마침 11월 17일까지 원서 접수를 받고 있었다. 최근 그 사실을 목사님께 말씀드렸었었기에 목사님께서도 알고 계셨다.
인성 검사나 필기 및 면접 시험 일정은 원서 접수를 하고 바로 몇 일 내에 이어지도록 되어 있었다. 일정을 보니 조금 고민이 되었다. 원서 준비 및 필기 공부를 할 시간이 너무 없었고, 지금 있는 곳에서의 거취도 확실히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외에, 또 하나의 자리를 염두해 두게 되고 있었다. 그 교단의 한 명망있는 목사님께서 연구원을 뽑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생각을 해보아야겠다고 머리속 한 켠에 저장해 두고,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h 목사님은 내가 수 년에 걸쳐서 하고 있는 신학 공부 모임을 이끌어 주셨다. 유럽에서 진보적이고 지성적인 신학을 공부하고 한국에 돌아오셔서도 그러한 방향으로 목회도 하시며 함께 뜻을 갖고 공부를 하기 위해 모인 사역자와 장로님들에게, 신학의 본산지에 가지 않으면 따로 배우기 힘든 전통적인 현대 조직신학 원서를 공부하는 모임을 인도해 주셨다. 인간적으로는 남성적이고 분명하고 고지식한 성격을 갖고 계신 분이다. 처음에는 어려워했으나 이제 어느덧 목사님께 인간적인 정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이 신학 공부 모임을 거쳐가며 함께 했던 스터디원들 중에서 거의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사람이되고 있었다. 따라서 목사님과 함께 공부를 하고, 끝나고 밥과 커피를 함께 하곤 하던 시간들도 켜켜이 쌓였다.
최근 사실은, 불확실성과 위험이 높은 투자에 난생처음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가 큰 돈을 잃어 버리고 경제적으로 극심한 어려움을 겪게 되고 있었다. 그 돈은 거룩하고 고귀한 의미가 있는 돈이었다. 아무리 내 돈이어도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돈이었다. 아직 되찾고 회복할 수 있는 작은 희망은 남아 있다. 그럴 수 있으리라고 지금도 믿고 있다. 하지만 어쨌든 망연자실한 기분으로 점점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용감하게도 내가 너무 큰 일을 저질러 버린 것이었다. 다행히 냉장고에 그 동안 틈틈이 사놓은 음식들이 있었다. 얼마 전에는 얼마 남지 않은 돈으로 쌀을 20 킬로그램 정도 사두었다. 하지만 밥을 해먹거나 설겆이와 청소를 할 마음의 힘이 없어 마구잡이로 한끼로 몰아서 겨우 먹어치우곤 하며, 무기력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늦가을에서 초겨을로 넘어가는 계절. 나는 작은 올드 빌라에 갇혀 몸을 새우처럼 움크리고 글루미 앤 새드 앤 파워리스 블랙홀로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우울과 무기력이 나를 잠식해가고 있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는 더 이상 쫓기고 싶지 않다는 단단한 의지도 내포되어 있었다. 이전 글들에서도 그런 나의 마음들이 조금씩 담겨 있었을텐데. 나는 무언가에 늘 쫓기며 살았었다. 정말 이제는, 얼마동안 살아있든지, 살아있는 동안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됐어. 괜찮아. 안 해. 그래도 괜찮아. 인생이 짧아. 그럴 필요 없어. 나는, 내가 되어야 해. 대신 거울을 보자. 버팔로에게 쫓겨다니는 노루처럼 뛰어다니지 말고. 이렇게 해도 되고, 저렇게 해도 돼. 어떻게 해야 한다는 법은 없어. 어떻게 해도, 아무렇게나 해도 괜찮아. 번번이 마음속으로 그런 결심들을 하면서 불안과 초조함의 시간들을 한 이파리씩 떼어서 냇물에 띄워 보내곤 했다. 흐르는 계곡물 위에 떠다니는 진홍빛 가을 낙엽처럼 세월 좋게, 세월 좋게, 시간은 잘도 흘러 갔다.
그런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더 이상은 쫓기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 더 이상 내가 아닌 것, 무언가 그럴싸해 보이는 것, 생명이 아닌 것, 사랑이 아닌 것의 압박과 속임수에 영혼을 팔아넘기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나, 성취나, 이성의 유혹이나, 일시적으로 기분을 좋게 만들며 시간을 증발시켜버리는 무엇에도, 헐값에 고귀한 나를 건네 주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팽팽한 장력의 시간 속에 있었다. 무력감과 건강한 고집 사이의 어떤 지점에서 나는 우주비행사처럼 견디고 있었다. 뱅글뱅글 도는 큰 기계 속에 들어가 원심력 훈련을 하는 것처럼 마음이 일그러져가고 있었다.
2. 나에게 쓰는 편지.
난 잃어버린 나를 만나고 싶어. 모든 잠든 후에 나에게 편지를 쓰네. 내 마음 깊이 초라한 모습으로 힘 없이 서 있는 나를 안아주고 싶어. 난 약해질 때마다 나에게 말을 하지. 넌 아직도 너의 길을 두려워하고 있니. 나의 대답은 이젠 아냐. 언제부턴가 세상은 점점 빨리 변해만 가네. 나의 마음은 조급해 지지만. 우리가 찾는 소중함들은 항상 변하지 않아. 가까운 곳에서 우릴 기다릴 뿐. 이제 나의 친구들은 더 이상 우리가 사랑했던 동화 속의 주인공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고흐의 불꽃같은 삶도 니체의 상처입은 분노도 스스로의 현실엔 더 이상 도움될 것이 없다 말한다. 전망좋은 직장과, 가족 안에서의 안정과, 은행 구좌의 잔고 액수가 모든 가치의 척도인가. 난 슬플 땐 그냥 맘껏 소리내 울고 싶어. 나는 조금도 강하지 않아. 신해철.
중학교 때 신해철의 노래를 좋아했다. 당시의 신해철은 젊고 패기있고 청명해 보였다. 어떤, 낭만적이고 근사한 용기를 가진 듯해 보였다. 그에게는, 자아를 찾아가던 도상의 나를 투영하기 딱 알맞을 만큼 순수하고 낭만적인 아름다움이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훗날 개신교인인 내가 보기에 그가 좀 너무 막 나가는 것 같아 온전히 좋아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청소년기에 나를 설레게 하기도 하고, 힘들 때 나를 지탱해 주기도 하던 그가 지은 몇몇 노래들은 눈부신 청춘의 송가가 되어 주었다. 그의 노래 몇 곡을, 불안한 현실 속에서도 마음 한 구석에 담아 두고 놀이동산의 안전장치처럼 아슬아슬하게 꼭 붙들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나에게 가장 소중한 노래는 ‘나에게 쓰는 편지’였다. 마음속 은밀한 보물처럼 이 노래를 좋아했다. 이미 그때. 나는 미래의 나에게 무엇이 정말, 소중할 것일지, 알고 있었던 걸까.
3. 스타벅스 2층에서.
언젠가. 그러니까 한 2년 전쯤이었을까. 아주 깨끗하고, 맑은 아침날이었던 것 같다. 큰 초록 잎사귀들이 스타벅스 통유리창 앞에 드리운 여름 즈음이일까. 요즘처럼 약간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쌀쌀하고 쓸쓸한 가을날이었을까. 퍽, 이른 아침었을 것이다. 엄마가 총총걸음으로 출근을 하며, 작은 손가방을 들고, 신호등을 건너서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 바로 아래, 스타벅스 1층 바로 옆 길가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유독 따듯하고도 강한 아침 볕이 선팅이 된 통유리를 뚫고 내 얼굴을 비추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아침 볕의 눈부심을 느끼면서 지하철역으로 걸어가시는 엄마를 가만히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나는 숨어버렸다. 정말 숨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니까.. 뛰어내려가서 인사를 하려고 한다든지, 엄마 휴대폰으로 전화를 한다든지. 그런 알은체를 일체 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엄마에게, 나 자신에게 부끄러웠던 걸까. 엄마는 집안을 다 돌보시고도 이렇게 아침에 출근을 하고 있는데. 나는 새로 생겨 너무나 쾌적하고 시원한 스타벅스의 2층의 넓은 홀에 앉아서 모닝 커피를 즐겨며, 무언가를 하려고 하거나 교회 일자리를 알아보려고 하거나, 아예 놀거나. 그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것은 그런데, 사실 괜찮았다. 엄마처럼 가까운 사이에는, 나는 정말 편하게 의지하고, 모든 사랑을 받고, 또 언제나, 언제든지, 혹은 언젠가, 내가 모든 사랑을 줄 마음가짐을 갖고 있었으니까.
문득 이즈음 어느날인가, 그 아침이 떠올랐다. 마음이 저렸다. 뛰어내려가서 엄마 안을걸, 꼭 안을걸. 엄마를 부둥켜 안고, 엄마 오늘 회사 가지마. 나랑 여행 가자. 나랑 단풍여행 가자. 나랑 스페인 가자, 엄마. 엄마가 보내줬던 스페인 가자, 나랑. 나랑 어렸을 때 온양에서 외할머니랑 이모들이랑 갔던 수영장 가자. 나랑 바다에 가자. 엄마 내가 회사에 말해줄테니까, 내가 아르바이트 해서 모은 돈으로 나랑 한 달 동안 놀러 가자. 나랑 1년 동안 세계 여행 가자. 엄마, 집에 가서 부침개랑 된장찌개 먹으면서 어떻게 할지, 어디로 여행갈지 회의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