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 감정이 어떤 끝을 향해, 아니 끝도 없는 망망대해가 펼쳐진 모래밭 위를 대책 없이 달려가는 것 같다.
자정 경, 오늘 처음 집에서 나와 찬 공기를 맞으며 약 팔천보를 걸었다. 기분이 상쾌해지고 삶에 대한 의욕도 조금 생기는 것 같았다.
집에 들어와 곧이어 요리를 했다. 무작정 잘게 썬 마늘을 팬에 넣고 올리브유를 적당히 붓고 삶은 스파게티 면과 이탈리아식 컬러 수제비(?)를 넣고 약간 볶다가 인스턴트 태국 카레 소스를 부어서 불을 줄이고 뚜껑을 덮어 두었다. 다른 팬에 세 송이버섯과 브로콜리를 올리브기름과 함께 익혔다. 태국 카레 스파게티를 옴폭 파인 스테인리스 그릇에 대충 넣고(긴 나무젓가락으로 돌돌 말아서 예쁘게 담고 싶었으나 잘 되지 않았다.) 그 위에 부었다. 바질 가루와 파슬리를 톡톡보다 많은 느낌으로 푹푹 부었다.
알라딘에서 펀딩으로 산 밝은 색 나무 상 위(얼마 전까지는 수개월 동안 책 박스를 상으로 썼었다.)에 학교 동생과 함께 참석했던 행사에서 사은품으로 받았던 녹차 김치를 차리고 유리컵에 삼다수 생수를 부어 놓고 수저와 스타벅스에서 산 빛나는 은색 스테인리스 포크를 올려 두었다. 파스타를 가져다 놓고 포크로 돌돌 말아서 입으로 가져갔다.
환상적. 심지어 고급스러운 맛이 났다. 그저 얻어걸렸다고만 하기에는 내 요리 솜씨가 조금 억울해할 소지가 있었다. 결혼에 진심이라는 리얼 예능을 좀 보았다. 약간 연애 세포를 자극하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시시콜콜하고 진부한 톤이었다. 아무리 외모가 매력적인 사람들이 나와도 나는 솔로만큼 재밌지는 않았다. 화면이 아무리 고급스러워도 역시 본질적인 부분, 그러니까 ‘이야기’나 생생함이라는 요소에서 딸리는 느낌이 들면 오히려 느끼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이어서 당연하다는 듯이 축구를 보기 시작했다(사실 그렇게 큰 관심이 없었지만). 찝찝한 느낌으로 냉장고에 남아있던 맥주 반 캔을 아까 남았던 삶은 면과 컬러 이탈리안 수제비로 내 마음대로 만든 엉터리 알리오 올리오와 함께 마셔버렸다. 전반전 오 분 정도를 지나며 이내 브라질에게 무참히 짓밟히고 있었지만, 나는 이전(2018년까지의 모든 월드컵, 특히 90년대의 월드컵)처럼 몰입하지도 않았고, 감정이 동기화되지도 않은 채 그저 무덤덤했다.
알쓸인잡에서 천문학자 심채경이 이런 말을 했다. 어느 날 NASA에서 누군가의 제안으로 천문학적인 기회비용이 드는 우주 망원경을 아무것도 안 보이는 공간을 향하게 하고 찍기 시작했는데, 머지않아 그 새로운 각도의 공간에서 또다시 수많은 은하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그렇게 새로운 은하계의 눈부신 사진들을 우리가 볼 수 있게 되었다고.
축구는 끝났고, 나는 멍하니 손흥민의 인터뷰까지 보았다. 그리고 불현듯 어둠이 찾아왔다. 아니 어둠이라고 표현하면 너무 불충분한, 그 아득한 느낌이 찾아왔다. 한 열 살 무렵이었던가, 그 무렵에도 느낀 적이 있었던 울렁거림이었다. 캄캄한 밤, 집에는 어린 내가, 혼자 있다. 엄마는 아침 일찍 나가신 회사에서 밤늦게까지 집에 오셨고, 어인 일인지 그날은 아빠도 누나도 없었다. 하루 종일, 혼자, 동네 형들과 놀다가 집에 들어와서도 혼자인 나는 커다란 안방을 서성인다. 그러다 갑자기 울렁거리고, 삶이 막막해진다. 그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외로움이나 무서움으로는 표현되지 않는 아득함.
그리고 삼십 년도 넘어 그것과 약간 비슷한 종류의, 그러나 그것보다 조금 더 아득하고, 조금 더 캄캄하고 조금 더 슬프고 조금 더 무서운 기분이 봄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혹독하게 새까만 우주가 내 영혼을 삼킬 듯이 찾아온다. 이 작은 자취집에도 안방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아득한 안방의 문을 닫고 엎드린다. 찬송을 튼다. 흐느끼고 칭얼거리다가 곧 엉엉 운다. 하나님과 엄마를 번갈아 부르며 떼를 쓰듯이 운다. 기도인지 원망인지 떼인지 모를 말들을 읊조리며 목놓아 마음을 던져 본다. 마침 앞집 딸이 출근할 시간이다. 이 80년대식 올드 빌라는 방음이 거의 되지 않아 지긋하신 아주머니(혹은 젊은 할머니)와 함께 사는 딸이 이른 겨울 아침부터 다 큰 어른이 앞집에서 어린아이처럼 우는 처량한 소리를 들으며 출근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을 피아노 음에 맞춰 부른다. 삶에 찬송가가 있어 다행이다. 그런데 주님. 저는 왜 이렇게, 이제 철저히 혼자라고 느끼게 되었을까요. 이제 전 정말 이 아득한 우주에서 혼자인 것만 같아요. 하나님은 우주를 지으시고 사람을 지으시고 저와 엄마와 가족과 친척과 교회 사람들을 지으신 분이 정말 맞으시죠. 정말 그렇죠? 근데 왜 전 함께 타고 온 가족과 친구들이 탄 우주선이 저를 안 태우고 지구로 돌아가 버린 아득하고 캄캄한 우주에 혼자 남겨진 것처럼 느껴질까요. 왜 이 외로움이 공포스러울 정도로 두렵고, 무기력하고, 괴롭고... 결국, 저는 어떻게 이렇게 안방에서 혼자 목놓아 울던 그 소년이 되었을까요. 저는 힘을 내서, 당신을 원망할 줄도 모르겠는데, 어떡하죠, 하나님.
그래도 마음에 안심이 되는 공간이 있었다. 이렇게 의지할 존재가 여전히 있다는 것이 나를 벼랑 끝에서 맹렬히 파도치는 차가운 바다 아래를 내려다보지는 않을 수 있게 하는구나와 같은 불안한 안도감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이러한 감정, 생각, 믿음이 아직 완전하고 확신에 찬, 선명한 것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수식하고 완성할 수 있는 선명한 짝이 되어줄 명사를 찾지 못한 채 부유하는 형용사나 부사와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그 불완전함을 모두 느끼며 불안에 떨며,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는 신앙과 괴로움의 실존을 온 마음과 몸으로 견디며 살아 있다. 작은 빌라의 구석 구석에서 끝도 없이 나오는 개미들이 내 인생의 문제와 고통 같다.
위로에 관한 설교를 튼다. 잦아진다. 절박한 상황에서 무리해서 산 새벽 배송이 왔다. 유기농 과일 젤리를 뜯어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함께 먹으며 쓴다. 먹고 또 먹는다. 먹는 것과 쓰는 것만은 계속해야 할 것 같다. 그래야 살아있는 동안은, 최소한, 살아 있을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