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폴트에 왔다. 나의 디폴트.
외서코너 G12 앞 두 칸 계단 위에 엉덩이를 깔고 앉으면.
난 이곳이 신라호텔보다 좋다.
내 인생의 얼마 되지 않는 시적 순간.
배가 고플 때 돈이 생기면 식당이 아니라 서점에 가서 눈과 코의 양식을 채우곤 했는데. 영혼의 양식이 아니라 코끝의 양식이었던 이유는, 내 행동이 읽기보다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를 맡고 이 모든 서점의 감각들을 구석구석 느끼는데 치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집중해서 치열히 읽고, 그런 치열한 부담감을 갖고 반드시 몇 권의 책을 사고. 그러려고 서점에 오는 것이 아니었다. 영혼의 양식을 채우지 않고 오히려 영혼을 비우려, 영혼을 누이려 이곳을 찾은 것이다.
책 냄새와 교보문고 향수 냄새(살짝 사람을 상기시키고 살짝 차분하게 만드는 특유의 향기)를 맡기만 해도 어딘지 모태에 들어온 것처럼 편안해서 충전의 기운을 얻고 돌아가곤 했다. 나의 서점 관광은 열정적인 유럽 배낭여행보다 어머님들의 2만 5천 원짜리 남해 관광버스 투어라든지, 동남아 휴양지의 해먹에 누워 첫사랑을 생각하며 졸다가 단 낮잠에 빠지는 시간 같은 것에 가까웠다.
우선 자리를 잡고 앉는 것이 중요하다. 서점의 핵심은 읽는 것이 아니라 앉는 것이다. 앉아서, 섣불리 책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냥 앉아 있다는 것. 쉰다는 것. 여기가 서점이라는 것을 가만히 음미해야 한다. 그리고도 너무 쉽게 책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조급히 책에 달려들어 너무 많은 페이지를 골몰히 읽기보다는, 그냥 표지를 보고 만지고 펼쳐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피곤한 하루를 보내고 나른해지는 초저녁쯤 나오기 싫은 소개팅에 온 것이다. 섣불리 자매의 눈을 응시하며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힌다든지 행여나 좋아해서는 안 된다. 난 이 공간에 최소한의 책임감을 갖고 일정한 시간 동안 감금되어 있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약간의 불편함과 긴장, 자기 감금의 감각을 갖추는 것이다.
다리가 저리거나 밖에 나가서 시원한 공기를 마시고 싶어도 참고 두 시간은 앉아 있어야 한다. 자취방에 들어가 원목 책상 위에 앉아 김치 부침개를 먹다가 그대로 나무 냄새를 맡으며 엎드려 자고 싶다는 생각처럼, 수없이 흩날리는 유혹과 상념들까지, 배고픔과 졸림의 감각까지, 모두 절제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에게 더 중요한 것은 대상보다 시간이다.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공간적 긴장의 감각을 붙든 채 이 시간을 만끽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주선자에게 실례가 되지 않기 위해 상대에게 예의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다만 마주앉은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상대와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커피를 홀짝이며 의미 없는 말들을 주고받는 것이다. 그것이 자매가 아니라 책일 뿐인 것이다.
혹은 미장원에 온 것이다. 미장원 소파에 앉아서 내 순서를 기다리며 호기심 반, 인생에 대한 체념 반의 마음으로 (여성 동아나 우먼 센스 같은) 잡지를 펼쳐 보듯이, 매대에서 집어 들고 온 책의 속지를 아무 데나 펼쳐서 그냥 또르르 글결을 따라가 보는 것이다. 이곳이 권사님들이 득실득실한 미장원이나 파마하는 두려운 여자들로 가득한 헤어숍이 아니라 서점 한 구석의 땅바닥일 뿐인 것이다.
그렇게 아득히 어떤 꿈결로 잠든다. 그러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맨홀뚜껑을 열고 들어가 스르르 낮잠이 들면. 붕 떠올라 갈 길을 잃었던 마음들이 외할머니네 온양 집 동네 저수지 위로 잠깐 떠올랐다가 숨어버리는 붕어처럼 저수지 깊은 곳으로 침잠되어 가라앉는다. 거칠었던 아가의 숨결이 쌔근쌔근 잠잠해진다.
이제 정말 너무나 드물다. 이럴 때. 이렇게 불안하고 초조할 때. 이토록 피곤하고. 기꺼이 내가 강아지처럼 좋아하는 사람들의 기대와 질책에 호응하지 못하고 마음이 치여 존재가 소외될 때. 영혼이 굶주리고 육체의 배가 고플 때. 새까만 어둠이 찾아왔을 때. 외서코너 책장에 오른쪽 몸 반만 기대 무심히 책을 펼쳐보는 것만큼. 나에게 쉼과 위로가 되어주는 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