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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 트웰브

by jungsin




다시 지 다시 십이에 왔다. 주일 오후 서점의 메인 플로어는 명동 거리처럼 붐비지만 외서코너는 훨씬 한적하다. 조금만 걸어서 왼쪽으로 돌아 깊숙이 들어오면 전혀 다른 언어의 세계가 있는데. 뜻밖에 사람들은 오래도록 이 길에 잘 들어서지 못하는 것 같다. 그냥 오면 되는데.


외서코너에 찾아오는 사람들의 눈빛과 국내도서 코너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눈빛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외서코너를 찾는 사람들은 조금 더 개방되고 상기된 듯한 눈빛을 하고 있다. 이곳에는 좀 더 내향적이거나 진지한 분위기의 사람들과, 약간의 외국인들이 눈에 띈다.


사람이 그러곤 하는 것처럼 언어도 우리를 제한하는 역할을 한다. 언어는 우리의 물리적 한계뿐 아니라 정신적인 한계를 짓는다. 서점은 그러한 사실이 뼈저리게 느껴지는 공간이다. 문학과 종교, 패션 잡지, 언론지, 경제. 각각의 언어에 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주로 각각의 코너에 한동안 머물다가 늘 관심 갖던 분야에서 몇 권의 책을 사들고 서둘러 나가버린다. 그들에게는 새로운 언어의 세계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시간이, 자신감이, 의욕이, 또는 이 모든 것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신기하지 않은가. 꼭 바벨탑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아도 이러한 단절과 구획은 신기하기만 하다.


나무로 만든 종이의 냄새를 맡고, 책장을 펼쳐서 낯설고 두려운 문장들을 훑어보면서, 이 세계는 내가 살아온 공간과 시간보다 훨씬 넓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할 수 있다. 여간해서는 이런 느낌과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사람은 오히려 구속하고 좁히곤 하니까) 언어와 책은 그 일을 한다.


언어가 사람을, 삶을 지배한다니. 억울하기도 하지만 그것 사실은 오히려 희망이 되기도 한다. 언어에 의해 삶이 제한되고 지배당한다는 것은, 뒤집어서 그것을 통해 자유롭게 날아가버릴 수도 있다는 뜻이 되니까. 그래서 다른 것에는 여유롭고 관대한 내가 언어에 있어서만큼은 자신을 채근하는데 잘못됨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다른 어떤 일보다 더 부단히 다짐하게 된다. 사람에게, 이성에게, 교회와 관련된 일에 진지한 것만큼 언어 앞에서 진지해져야 한다고.


그러니까 아마도 나는 끊임없이 알을 깨고 나가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내 세계를 넓히고 싶어 외서코너를 일부러 찾아가 보는 것이다. 옹알이 수준의 실력임에도 그냥 영문학 클래식 코너를 기웃거려 보고 일본어 잡지를 펼쳐 보는 것이다.


주일 오후 최근에는 두세 주 정도, 한 목사님과 담소를 나누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목사님의 음식 취향이 모험을 즐기지 않고 가는 곳을 계속 가는 편이어서 점심은 주로 늘 가는 클래식한 식당(예컨대 곰탕집, 또는 곰탕집, 아니면 곰탕집)에 갔다가, 카페에 가서 이야기를 나눈다. 나도 카페에는 진심이어서 기어가는 목소리로 소극적인 제안(이제 그만 새로운 곳에 가자며)을 줄기차게 하곤 했는데, 요즘 은 카페만큼은 variation을 주는 데 성공하고 있다.


오늘은 목사님이 나의 무지함에 아연실색을 했다. 어떻게 릴케의 가을날을 모를 수 있느냐며, 목사님 때는 교과서에 실려 읽을 수밖에 없었을 만큼 유명한 시인데 릴케도 안 읽고 뭐 했느냐며 면박을 당했다. 공유한 브레히트는 좀 읽어보았냐며 물어보시는데, 앞부분만 살짝 보았다고 나도 모르게 얼버무리며 슬쩍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달게 들린다. 엄격한 물음과 채근들이 반갑다. 누군가 내게 어떤 고지식한 기준을 가지고 물음을 던져오며, 엄격히 노려보는 기분이 실은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좋고 감사하다.


사실 나는 권위에 대해 유순할 뿐 아니라 무력하기마저 한 성격이었고, 아버지와 선생님을 어려워했던 세대에 속해서 어른을 대하는 것을 쉽게 느끼는 사람은 아니다. 그럼에도 목사님과의 만남이 즐겁다. 아무나 가질 수 없는 특혜라고 느낌만큼, 나에게는 알차고 의미 있는 교제다.


세대와 문화와 기질마저 다른 신학의 선배와 나를 묶어주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신학적 지성 안에서의 지향성이고 두 번째는 일반적 지성 안에서의 지향성이다. 지성적인 면에서는 오히려 목사님이 나보다 더 청년이다. 나는 살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살아서 뭐 하나 그런 생각에 사로잡힌 채 젖은 낙엽처럼 살아가는데. 그분은 언제나 뜨겁고, 하고 싶은 것도 많다. 어떤 대목에서는 내가 더 보수적이고 막혀 있다는 것을 번번이 느꼈다. 이 교제는 지극히 불균형적이고 불공정한 교제다. 난 그저 깍두기와 김치를 자르고, 진동벨이 울리면 커피와 마들렌을 들고 올뿐이지만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전존재적인 배움이다. 독대가 거듭될수록 내 안에서 끌어낼 지성과 교양의 고갈을 느껴 민망하지만 계속 살 거라면 배움을 포기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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