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정확하지 않다. 스페인에 도착한 첫날밤이었던가. 스페인의 다른 도시에서 이미 며칠의 일정을 보내고 새로운 도시에 도착한 첫날밤이었던가.
확실한 것은 시간뿐이다. 여섯 해를 빼고, 열 해를 빼고, 다시 두 해를 더 빼야 그날로 돌아갈 수 있다. 한 겨울이었고 어느 깊은 밤이었다. 우리는 한 도시에 도착했다. 아마 마드리드가 아니었을까. 각자의 캐리어를 질질 끌고 스페인 거리 특유의 냄새를 맡으며 캄캄한 도시 한 복판을 바삐 걸어 나갔다. 드르륵드르륵드르륵 캐리어 소리가 지금도 귓전을 울리는 것 같다. 그 밤거리의 냄새는 나를 상기시키는 아주 기분 좋은 향수 냄새로 내게 기억되어 있다. 숨 가쁘게 닿은 곳은 한 유스호스텔이었다.
그때는 유스호스텔이라는 것이 뭔지도 잘 몰랐다. 스페인어를 할 줄 아시는, 현지에서는 전지전능해 보이기만 했던 팀장님을 그저 점잖게 따라갔을 뿐이었다. 좁은 복도를 걸어 올라가 프런트에서 체크인을 했다. 미리 준비해 놓았던, 작은 카드 모양의 영문 국제 학생증을 내밀자 할인이 되어 한 사람당 만원 내외 정도의 가격으로 조식을 포함한 숙박의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깜깜했다. 새까만 방 안. 2층 침대가 세 개 정도 놓여 있었나. 각 베드에는 젊은 서양인 청년들이 누워 이미 깊은 잠을 자고 있었다. 누군가 코 고는 소리가 또렷이 울려 퍼질 정도였으니까. 깊은 밤의 유스호스텔은 아주 고요하고 정숙했다.
내 자리는 문을 열면 바로 오른쪽에 있는 침대의 2층이었다. 방은 아주 좁았는데, 그중에는 여자 청년도 있었던 것 같다.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아주 잘못된 기억인 것 같지만은 않다. 문화 충격에 대한 놀라움과 떨림으로 한동안 잠을 못 이루며 뒤척였던 기억과, 콩닥콩닥 뛰는 스물여덟의 심장을 지금도 선연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낯선 도시에서 추운 길거리를 헤매다 들어간 숙소여서인지 그 방은 근사하고 아늑한 감각으로 다가왔다. 고가의 휘향 찬란하고 넓은 호텔보다 오히려 더 완벽했다. 호기심 가득한 서양의 남녀 청년들과 작은 방에서 숨결을 섞으며 잘 수 있었으니까.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사실 그 다음날 아침의 기억이다. 그렇게 싱숭생숭해하며 뒤척이다가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여독 때문인지, 설레는 심장의 비트로 잠들어서인지 나는 그 2층 침대에서 기대보다 너무 달게, 잘 자고 일어났다. 공동 샤워실에서 아침 샤워를 하고, 상쾌한 기분으로 지하에 있는 식당으로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아직 아무것도 상상할 수 없었다. 비행기도 처음 타보았던 나였다. 도대체 조식이란 무엇일까. 유스호스텔이란 무엇인가. 스페인이란 무엇인가. 스페인의, 유스호스텔의, 조식이란 무엇일까. 엄마손파이처럼 겹겹이 신비로운 순간이었다.
아무 막힘이나 망설임도 없이 아침 식사를 가지고 와서 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곳의 상시 투숙객이고 나에게도 다 너무나 익숙한 일상이라는 듯. 여섯 시 반쯤 되었을까. 아주 이른 아침이었는데, 벌써 주변에는 젊은 청년들 몇몇이 신선한 옷차림을 하고 어디론가 정해진 곳으로 외출을 할듯한 분위기로, 각자 테이블에서 조촐한 아침을 즐기고 있었다. 빵과, 버터, 커피 등으로 이뤄진 콤팩트한 브렉퍼스트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각 오브제들이 하나같이 신선하고, 향긋하고, 달콤했다. 내게는 다 황홀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 나는 서울 변두리 동네에서 맨날 똑같은 친구들을 만나고 맨날 똑같은 학생회관 학식과 익숙한 곳들, 그러니까 교회, 집, 학교, 그리고 4호선과 1호선 지하철을 삶의 무대의 전체인 것처럼 알고 하루하루 살아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스페인의, 유스호스텔이라고 하는 사랑스러운 건물의 지하 식당에서 유럽의 청년들과 함께 한껏 들뜬 감정을 억누르며 상쾌한 조식을 먹고 있다. 바로 맞은 편의 작은 식탁에는 수염을 편안하게 기르고 안경을 쓴 남자 청년이 신문을 보면서 향긋한 커피와 빵을 즐기고 있고, 음식이 놓여있는 긴 배식 테이블 쪽에는 여대생들 두어 명이 올라 께 빠라도 수다 떨며 빵을 집어 들고 있다. 그제야 의심하지 않을 수 있는 환하고 선명한 빛이 내 영혼에 드리웠다. 인생이 너무나 신비롭고 드넓다고 느꼈다.
곧 팀 아침 기도 모임이 있었을 것이다. 정말 짧았던 아침 시간이었다. 음식도 가벼운 아침 메뉴들이었는데, 그 아침의 모든 것들이 너무나 새로워서 두근두근할 정도로 설렜다. 아침의 아름다움을 그보다 더 완벽하게 감각할 수는 없었다. 그때는 내가 그날들을, 그날들의 아침을 이토록 그리워하게 될 줄 일지 못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선명하게 살아있고 진하게 향긋했던. 아침의 이데아처럼 박제되어 버렸다.
좋았던 기억들을 반복 재생하며 현재를 잃어버려도 좋다. 그것이 살아있는 한 방법이라면 그래도 좋다. 괜찮다. 다. 다 괜찮다. 나는 자신에게 이렇게 계속, 끊임없이 끊임없이 말해주려 애쓴다. 정말 듣고 싶은 말이지만, 누구도 해줄 수 없는 말이어서. 스스로 해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