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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gsin Mar 19. 2023

피아노를 치듯이

일종의 실용 글쓰기 개론



피아노 위에서 글을 쓰고 있다. 이렇게 피아노 위에서 글을 쓰는 일은 많지 않다. 아니, 거의 처음이거나, 몇 번 정도 이렇게 써본 적이 있었던가. 마음 잡고 글이 쓰고 싶어서 다급히 피아노 위에 죽 늘어져 있는 그림 포스터나 악보, 얇은 타블로이드 잡지와 같은 집기들을 치우고 행주로 피아노 위를 닦고 세팅을 했다. ​


그래서 이제 드디어, 쓴다.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몸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물론 누워서 쓸 수도 있고 그렇게도 좋은 글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렇게 쓰는 글쓰기는 앉아서 쓰는 글쓰기보다 행복하지 않다. 행복하게 글을 쓰려면 수도사의 자세처럼 몸을 일으켜 세우고 약간의 긴장감을 머금어야 한다.

다음으로는 글을 쓸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책상은 언제나 어수선하다. 우선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는 ​책들을 다른 곳으로 옮긴다. 커피를 마신 머그컵과 빵가루가 남아있는 접시들은 깨끗이 싱크대 안으로. 책상 위를 완벽하게 싹 비워야 한다. 까만 밤처럼 아무것도 없는 상태의 책상을 만들고, 표면을 매끄럽게 닦아야 한다. 그리고 이제 글을 쓸 노트북이나 태블릿, 키보드를 올려놓는다. 타건감이 타자기처럼 무겁게 감기는 키보드라면 더없이 좋다.

기분에 따라서는 올려놓기만 해도 마음 한 구석을 따듯하게 비춰줄 책 한두 권 정도를 옆에 올려놓아도 좋다. 아늑한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위트 있는 문체의 요리 에세이, 사진이 들어간 일본 가정식 요리 책, 또는 소설을 올려두는 것이 좋다. 어떤 장르의 책이든 표지가 단 침이 삼켜질 정도로 아름답다면 글쓰기에 도움이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처럼 말이다. 철학 서적이나 전공 서적은 멀리 두는 것이 좋다.

그리고 글쓰기에 빠져서는 안 될 커피. 이제 슬슬 봄기운이 느껴지는 이즈음이라면 얼음을 가득 채운 케냐는 모범답안이다. 스페셜티 품질의 동티모르나 르완다도 좋다. 커피를 내려서 얼음을 가득 채운 컵에 붓고, 약간 거품이 나올 정도로 머들러로 휘저어 노트북 옆에 올려놓고, 전원을 켜고, 글을 쓸 프로그램을 열면 이제 글쓰기 환경의 준비는 된 것이다.

​다음으로는 수많은 고민들이 최대한 정리된 마음과, 방향성을 정한 영혼이 필요하다. 이 부분은 좀 중요한데, 최대한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이 두 가지가 완벽히 준비되는 때란 거의 없게 때문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는 그냥 ‘최대한’ 다듬어 무대로 올라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아예 무대로 올라갈 수 없을 테니까. 책상이라는 무대는 그냥 무거운 삶을 다 떠 앉고 이고 지고서 올라가 앉는 곳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안 그러면 오늘도 쓸 수 없다. 최면을 건다.


​​다음으로는 몸이 필요하다. 오랫동안 집중해서 한 편의 글을 쓰려면 무엇보다 잘 먹고 잘 쉰 상태의 몸이 필요하다. 이 부분은 마음의 준비와 달리 절대적인 준비가 필요하다. 몸이 무겁고 피곤한 상태로도 글이 잘 써지는 사건은 아주 드물게 일어난다. 그러니까 피곤하면 그냥 쉬는 것이 좋다. 하여 일단 쓰다 만 글쓰기의 기억도 잊어버리고, 글쓰기의 ‘ㄱ’조차 잊고서, 더 이상 잠이 안 올 때까지 늘어지게 잔다. 잘만큼 잤으면 일어나서 간단히 신선한 과일이나 간식을 준비해서 먹고, 위의 과정들을 하나하나 준비한다.

​한 철학자는 피아노는 손가락으로 치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치는 것이라고 했다. 손이라는 것은 손을 포함해 유기적인 작용을 하는 온몸을 의미하는 것이다. 온몸과 몸속 장기의 컨디션이 유기적으로 움직여 글을 쓴다. 언어를 물처럼 짚고 가르며 끝없이 끝없이 드넓은 망망대해로 헤엄쳐 나간다. 행복한 글쓰기의 비결은 몸의 감각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다.


​​


나의 생활은 점진적으로 망가져 가다가 이즈음 비로소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었다. 마침내 며칠 동안 햇빛을 거의 쐬지 않았을 정도로 낮과 밤이 뒤바뀌고 감각과 마비가 뒤엉키게 되었다. 걱정하고 우울해하며 지쳐 있기. 이전이라면 얼른 빠져나오려고 했을, 그러한 상황에 너무나 익숙하고 무뎌져 있다.

오늘도 새벽에서야 첫 끼이자 마지막 끼니를 먹었다. 직접 만든 떡볶이와 감자튀김, 드립 커피에 대충 남은 우유를 부어서 들이킨, 가난한 끼니였다. 치우고 만들고 차리고 다시 치우고. 어느새 너 다섯 시간이 훌쩍 지났다. 몇 시간 한바탕 순전히 먹기 위한 난리를 피우고는 늦은 새벽녘, 작고 사소한 고민들을 하다 잠이 들었다. 잠시였지만 깊이 곯아떨어졌었나 보다. 실수로 아침 일찍 일어나 버렸다.


오랜만에 맞는 아침. 베란다에서 봄 햇볕을 쐬어 보고 싶었다. 방에는 바닥에 우중충하게 늘어져있는 책들과 함께 책상이 있지만, 무슨 바람인지 정말 베란다 가로 나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보이지만 나에게는 큰 도전과 변화였다. 그러자. 베란다 가에서 정말 써보자. 잘 못 써도 좋으니, 일단 볕을 느끼면서 앉아 있어 보자.

엉망인 베란다. 그 속에 파묻혀 있는 츄파춥스. 교회에 후원하려고 생각했던 츄파춥스 박스를 뜯어버렸다. 냉동실에서 얼음을 꺼내 새벽에 내려두었던 드립 커피를 부어버렸다. 이렇게만 해도 조금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을. 아주, 아주 조금이지만.

작은 희망들이라면 여러 가지가 있다. 얼마 전 다정하게 말을 걸고는 자꾸 주변에서 어른거리던 순박한 바리스타가 그렇고, 식사자리에 나란히 앉아 바로 옆에서 슬쩍 본 옆모습이 너무 생기 있게 살아있어 수년 만에 설렘을 느끼게 했던 누군가도 그렇다. 그들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마음에 약간의 흠집을 냈다.


힘이 없는 중에도 꾸준히 듣고 있는 베토벤과 바흐와 같은 고전 피아노 곡들도 작은 희망들이 된다. 커피, 그리고 동네에 숨어있는 분위기 좋은 카페들이 그렇다. 빵이나 햇살, 봄기운. 모두 작은 희망들이 되어 준다.


작은 희망들 중에 가장 덜 작은, 그러니까 그래도 가장 걔중에 크게 희망이 되는 것은, 이즈음 글인 것 같다. 카페의 여종업원도 아른거리고, 보자마자 설레기 시작해 설렘으로 끝났던 사람도 그렇지만, 글이 조금 더 깊고 아득하게 아른거린다. 읽기나 쓰기는 다른 희망들과 다른 느낌으로 설레고 다른 걸림으로 눈에 밟힌다.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쓰는 ​편지’에서 시인을 꿈꾸는 젊은 야망가의 편지에 답한다. 자신이 인정받는 시인이 될 수 있을지 나에게 감상평을 묻기 전에 젊은 시인이 스스로 자신에게 좀 물어보라고. 글을 쓰는 일이 죽음과도 맞바꿀 수 있을 정도로 간절한 일인지. 젊은 시인 당신, 자신에게 진지하게 스스로 물어보라고 말이다.


내가 글쓰기를 그렇게 사랑하는지는 아직   없다. 그냥  재미있을 뿐이다. 에메랄드  바다 뛰어들어 엄치고 싶은 소년의 마음일 뿐이다. 이따금은 타고 올라 뛰어넘고 싶은 위대한 벽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안기고 싶은 품처럼  느껴져 설레기도 한다. 여기서 울어야겠다. 여기서 뒹굴고 웃고  쉬어야겠다. 그런 생각을 들게 한다. 숲처럼, 또는 어릴  넓게 펼쳐진 모레  운동장처럼. 글은 나를 불안하게 흔들지도 않고, 아득하면서도 건강하게 설레게 한다.


그래서 이렇게 피아노에 앉았다. 무엇을 쓸까 보다 무엇을 지울까 가 더 고민이다. 쓸 말은 너무 많아 문제다. 뭘 어떻게 써야 할지를 아는 사람이 작가가 돼 가 보다. 메모해 둔 글들이 사 둔 책처럼 넘쳐난다. 쓰지 않고 읽지 않고 살지 않은 시간들이 소년의 울음에 젖어 일어서지를 못하고 있다. 내 시간처럼, 하루하루처럼 일제히 다 죽어서 일어서지 못한다.


피아노 앞에 앉아서 쓰다 보니까 음악의 운율을 느끼며 쓰게 된다. 손이 피아니스트처럼 움직이고 있다는 착각이 든다. 가끔 할 말이 떠올라 글을 쓰려고 하다가 헷갈려서 건반 위에 손을 올리려고 하는 나를 발견한다. 글쓰기를 피아노를 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걸까. 그렇게 쓸 수 있으면 좋겠다. 임현정이 베토벤 연주를 하듯이, 조성진이 쇼팽을 치듯이, 임윤찬이 리스트를 치듯이,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막힘없이.








아, 나는 피아노를 칠 줄 모른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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