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g.
write.
write. write, again.
그러나.
반성.
나는 아직 얕고 넓게 파헤치고 있어.
Digging Writing
1
글쓰기의 정수를 느끼며 글을 써보고 싶어서 이런저런 습작들은 써본 사람은 꼭 직업적 작가가 아니라도, 그의 영혼에 작가의 혼이 이미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입안에 사탕을 넣고 이리저리 굴리듯이 문장을 썼다, 지웠다 반복하고, 게시판에 올린 글을 공개로 했다, 비공개로 했다 반복해 본 사람이라면, 그의 영혼에는 작가적 간지러움이 움트고 있는 것이다. 앞뒤로 꽉 막혀 있는 작은 가슴팍에서, 간질간질한 이야기의 씨앗이, 다소 짜증스럽게 몸을 비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나의 간지러움의 역사는 짧지 않다. 내내 간지러움은 시원하게 긁음으로써만 해소될 수 있는 것이어서, 숱하게 비공개 글을 썼더랬다. 그러니까 이십 대 후반이었나. 은밀하고 내밀한 이야기의 시작은 싸이월드 다이어리였다.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못난 글을 써 놓고는, 혼자 이불을 덮고 누워 히죽히죽 웃으면서, 스스로 내가 쓴 글의 독자가 되어 흡족해하며 읽다가 이내 부끄러워져 비공개로 덮어놓고 잠들곤 했다. 새벽에 아무 생산성 없이 몇 시간씩 그런 일을 했다.
그러다 우연찮게 내가 쓴 글이 그래도 좀 읽어줄 만하다고 느껴지면 하나씩 하나씩, 공개로 올려놓아 보곤 했다. 그 무렵 내심 좋아했던 여학생이 있었는데, 기억을 더듬어보면 사실 그 여학생을 좀 의식하면서 썼던 것 같다. 그 애가 혹시 들어와서 다이어리를 보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런 글은 좀 멋있어 보이지 않을까. 이런 글을 혹시라도 보게 되면, 메마른 땅에 피어나는 봄새싹처럼 이성 감정이 싹틀 수도 있지 않을까. 나의 다이어리에는 그래서 더 심각하게 낯부끄러운 문장들이 나부꼈다. 자기 추앙적 글이나 자기 반성적 글이나, 결국 좋아하는 여학생과 싸이월드 일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목적이 응큼하게 똬리를 틀고 있었다.
보통 이불킥을 하지만, 나는 눈을 뜨면 새벽에 늦게 잔 탓에 정신없이 샤워를 하고 학교로 뛰쳐나가기 바빴다. 이제 와 보니 눈부셨던 시절만큼이나, 그 모든 것들은 하나의 낭만이었다. 그렇게 부끄러운 글을 잊어버린 채, 점심 저녁으로 커피를 대여섯 잔은 마시고 생기 있게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러다가 하루 이틀이 지나 다시 싸이월드에 들어가면 역시 내 글은, 몸이 다 저릴 정도로 부끄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미 비공개로 하긴 늦은 때였다.
알다시피 페이스북이 생기고 싸이월드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나의 다이어리는 이제 페이스북 피드로 무대를 옮겨갔다. 그래도 변함이 없었던 것은, 난 여전히 사람들을 의식하며 쓰곤 했고, 또 내 글이 너무 부끄러울 때 비공개로 바꾸는 패턴도 큰 변함은 없었다.
2
2022년 노벨문학상은 아니 에르노가 받았다. 스웨덴 한림원은 아니 에르노를 선정한 이유로 “개인의 기억 속에 깃든 근원과 소외, 집단적 억압을 용감하고 예리한 시선으로 탐구했다.‘고 밝혔다.
‘깃들다.’와 ‘탐구하다.’라는 두 동사는, 방향성이 모두 안쪽을 향한다. 어떤 대상의 안쪽으로 파고드는 것이다. 특별한 경험이 누군가의 내면에 깃든다. 무언가 깃들기는 했는데, 그는 자신 안에 깊숙이 스며들고 깃든 그것들이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른다.
눈부시게 아름답고 혹독한 사랑, 가슴 저미는 그리움, 가혹한 현실. 모든 경험이 무한한 나의 영혼에서 안식하지 못하는 정령처럼 떠다닌다. 그것들을 탐구하기 위해서 작가는 영혼의 무덤을 파헤쳐야만 한다. 그때 작가가 드는 삽은 ‘언어’다.
자신 안에 깃든 것들은 영혼 깊숙이 박혀 있다. 그것의 정체는 신비에 감춰져 묘연하다. 그러니까 작가의 삽질은 곱고 어여쁜 것이기만 할 수 없다. 숙삭숙삭. 푹. 퍽. 괴상하고, 음산하고, 거친 작가의 삽질. 그것이 자신의 영혼을 파헤치며 글을 쓰는, 용감한 작가의 손길이다.
작가는 모든 것으로써 써야 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를 지키기 위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를 내던지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자기를 내버리고 다 쏟아버리고, 그래도 남은 것이 없는지. 다 탈탈 털어버리고. 그리고 차분히 정화된 마음으로, 가볍게 세상을 다시 살아가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다. 보통 쓰는 사람은 생을 포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을 살아내기 위해서 이런 까다롭고 부끄러운 일을 한다. 그렇게 쓰는 이에게 글쓰기란 밝은 날은 뭉클하도록 따듯한 해가 되고, 캄캄한 날은 시리도록 절실한 빛이 된다. 정조를 지키기 위한 은장도처럼 정말 자신으로써 살아가기 위한 어떤 결정적인 도구가 된다. 쓸수록 점점 자주 그렇게 되어 간다.
나는 나를 공개하고 내던지는 일을, 이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몸서리쳐질 정도로 창피한 글을 공개로 해 놓는 것도, 끝을 알 수 없는 내 안의 어둠과 슬픔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좋아하는 여학생도 없고 싸이월드도 없다. 그래서 이렇게 음산한 밤, 깊고 깊은 새벽, 이제 다 어른이 된 사촌들은 잘 찾지도 않는 시골 과수원 앞 무덤에 찾아가서 울부짖으며 영혼의 파묘를 한다. 울고 불며 자기를 부르고 엄마를 부르고 하나님을 찾는다. 내가 피해 숨었던. 혹은 나를 피해 숨었던 모든 이들을 목놓아 부른다. 이런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존재는 이제 거의 없다.
'거의' 안에 수많은 질문을 내 앞에 던져 놓고 숨어버리신 하나님이 있긴 하지만, 보통은 하나님을 찾을 마음의 힘이 없다. 그냥 에라 모르겠다 하고 이렇게 자판을 두드리며 묻힌 무언가를 자꾸만 파고 또 파본다. 내 가장 깊숙한 곳에 무언가 뜨거운 것이 있는데. 아직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몰라서. 만년 싸이월드 다이어리 작가인 나는. 겉만 핥는 나는. 그 뜨끈한 것이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서, 또 헛삽질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