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고들며 피어나는 나무

by jungsin



난 배가 고플 수도 멍이 들 수도 있어.
미친 사람처럼 거리를 배회할 수도 있어.
그래, 내가 하지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어.
네가 나의 사랑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라면.

Bob Dylan,
To make you feel my love.



1. ​씨앗


씨앗이 땅속 한 뼘 깊이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 씨앗은 어느 여름, 바람에 날려 우연히 심겼다. 서늘한 땅속에서 습하고 무더웠던 여름과 으스스했던 가을, 오싹했던 겨울을 모두 견뎠다.


그해 겨울은 씨앗에게 유독 길게 느껴졌다. 지루할 정도로 길었던 그 겨울이 드디어 지나고, 다시 해가 대지를 덥히는 계절이 왔다.


씨앗의 가슴팍에서 생명이 간질거렸다. 오랜 간지러움을 견디자 씨앗의 젖비린내 나는 품에서 새싹이 움텄다. 씨앗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이 감격했다. 너무 기뻐서 자신이 터져나가는 고통도 잊은 채 그 계절을 지났다.



2. 싹


싹은 씩씩하게 자라 줄기가 되었다. 줄기는 푸설푸설한 흙의 무게를 견디며 천천히 피어올랐다. 마침내 흙을 뚫고 나왔고, 땅 위에서 날마다 자라며 볕을 마음껏 쏘였다.


그렇게 자라나다가 줄기는 자신 안에 몰캉몰캉한 몽우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어느 봄에 불쑥, 꽃이 피었다.




3. 꽃


꽃은 생명력으로 가득 찼다. 꽃의 삶은 매일 활기와 의욕으로 가득했다. 햇빛이 아무리 강해도, 꽃은 하나도 눈부시지 않았다. 강열하게 뜨겁고 환한 볕을 다 가슴에 담을 수 있었다. 매일이 놀이동산처럼 신났다.


꽃은 몽우리도 잊었고, 줄기도, 싹도 있었다. 자신의 근원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매 순간 더욱 피어났다. 점점 농익어가며 만개했다. 꽃은 씨앗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4. 흙


하지만 씨앗은 꽃을 구경도 하지 못했다. 싹과 줄기는 보았지만 완전한 볕은 내내 땅속에 있느라 한 번도 쏘이지 못했고, 꽃도 물론 보지 못했다.


자신이 몇 번의 계절을 품고 있던 싹이 터서 나온 줄기를 보며 기뻐했지만, 꽃도, 그것의 몽우리도 보지 못했다. 다만 어둡고 찬 흙속에서 줄기의 무게가 무거워지는 것과, 흙 바깥 볕의 기운을 아련히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씨앗은 점점 작아져갔다. 줄기가 자라나는 만큼 자신이 작아졌지만 씨앗은 그것이 하나도 싫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덧 주름진 껍질이 되어 땅속으로, 씨앗은.




5. 나무


몇 번의 계절이 흘렀다. 줄기는 훌쩍 커서 큰 나무 몸통이 되었다. 나무는 깊은숨을 쉬었다. 그것은 한숨이기도 했고, 슬픔이기도 했고, 희망이기도 했다.


나무는 이제 쉽게 쓰러지지 않을 정도로 두터워졌다. 줄기였을 때처럼 위태롭고 가녀린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점점 높이 자랐고, 봄마다 더 크고 화려한 꽃들을 피웠다.


​나무는 태양과 비와 바람을 맞으며 조용히 높아졌다. 아주 아주 높고 두터워졌던 어느 무렵, 진한 향이 나는 검붉은 열매가 주렁주렁 맺혔다.




6. 뿌리


​나무는 씨앗을 그리워했다. 실은, 내내 씨앗을 잊지 못했다. 나무는 날마다 숨죽여 울었다. 나무의 가장 깊은 골에 있는 나이테로 울었기 때문에 주변의 어떤 나무와 꽃들도 나무의 그리움을 알지 못했다.


​어떤 날인가는 가슴이 너무 아프고 저려 몸통 속의 나뭇결마다 아주 진하고 끈적끈적한 진액이 맺혔다. 그런 날들은 점점 잦아들었지만, 하루도 씨앗을 잊은 날은 없었다.


​나무는 밑둥치로 씨앗을 그리워하는 뿌리를 뻗었다. 뿌리는 엉겅퀴처럼 무질서하게 단단한 땅을 뚫고 깊이, 깊이 뻗었다. 아우성인 뿌리 가닥들 때문에 흙 위의 나무통은 더 안정적으로 보였다. 어떤 들짐승이 매달려도 흔들릴 일이 없었다.




7. 흙과 나무


씨앗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씨앗은 흙이 되었지만 여전히 뿌리를 끌어안으며 매일 뿌리와 만났다. 뿌리는 날마다 칭얼거리며 그리움으로써 흙으로 파고들었고, 씨앗은 나무에게, 흙으로서도 씨앗이 되어 주었다. 흙은 수분을 머금고 *침윤浸潤하는 뿌리를 부둥켜안아 주었다.


​씨앗은 여전히 씨앗이었다. 흙의 모습이었을 뿐이었다. 비가 내려 자기가 흠뻑 젖은 날도, 해가 강하게 내리쬐어 자기가 마르는 날도 그랬다. 매일 울며 파고드는 뿌리를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나무는 이제 위로는 더 자라지 않았지만, 뿌리는 땅밑으로 계속 복잡하게 뒤얽히며 굵게 자랐다. 줄기가 되었고 꽃이 되었고 나무가 되었고 열매가 되었던 뿌리는, 자기를 감싸 안고 있는 흙에게 한도 끝도 없이 어린아이처럼 부비고 안기었다. 흙 위에서는 어른이었지만 어두운 땅 아래서는 아이였다. 그렇게 깊어져만 갔다.



* ​침윤: 식물의 종자가 발아하기 전에 녹말이나 섬유소 따위의 물질에 의하여 수분을 흡수하는 현상. 에너지가 필요하지 않은 피동적 흡수이다. (네이버 국어사전)




​​8. 계절


​오늘처럼 맑은 봄날이면 작은 새들이 나무에 앉아 지저귀었다. 무더운 여름날에는 아이들이 나뭇잎이 우거진 그늘 아래로 와서 쉬었고, 가을이면 연인들이 나무 아래에서 안고 속삭였다.


그리고 겨울에는, 나무와 흙만 있었다.

나무와 흙.

가장 단단하게 둘이서만 안고 있는 시간은 겨울이었다.


꽃이 피면 사람들은 피어난 봄을 보지만, 나무는 자기의 시간이었던 씨앗으로 더 한가득 숨었 다. 나무는 피어난 적이 없었다. 뿌리를 내리고 서서 울고만 있었다. 모두들 바깥으로 퍼져나가는 계절에도 나무는, 무엇의 안으로, 안으로 파고들기만 했다.


꽃은 터져 나온 현상일 뿐이었다. 나무의 영혼은 그리움에, 그를 발아했던 씨앗 속에 있었다. 봄이 되면 나무는 씨앗의 젖비린내를 더 그리워했다. 흙속으로 한도 없이 파고들며 더 철없이 칭얼거리고 싶었다. 또 새싹처럼 발아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