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글쓰기엔 약간의 희생이 필요하다. 배고픔이나, 연락이나, 약속, 책임과 의무, 사람의 도리 같은 것을 가끔 저버려야만 한다. 글을 제 때 써야만 하는 사람에게, 그러니까 무언가를 쓰는 일이 자신에게 정말 소중하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그런 일은 꼭 일어나고 만다.
배고프지만, 당장 밥을 차려먹지 않고 쓰면 불쑥 떠오른 감상과 사유의 물고기들을 체망으로 건져 깨끗한 어항에 옮겨놓을 수 있다. 외출을 미루거나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미장원에 가는 일이나, 빵을 사 오는 일을 잠깐 미뤄두면, 오렌지 같은 오늘의 햇볕을 좀 미뤄두면, 나의 마음 한켠의 보물 같은 그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면 뱃속의 허기짐을 대신할 영혼의 허기짐은 어느 정도 채워 놓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일에는 명암이 있다. 그렇게 되면서 자신을 좋아해 주는 사람들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나를 떠나갔지만, 떠나가고 놓아주는 일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땅이 융기된 곳 주변 어딘가에는 지표면의 크랙도 있듯이 그럴 수밖에 없던 걸까, 그냥 나의 힘이나 덕이 부족했던 걸까. 한 사람 한 사람, 하나하나, 나에게는 정말 소중한 존재들인데. 쓰린 마음을 안고 이런 삶으로 흘러가는 나를, 나는 가만히 지켜본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렇게, 나의 뱃속이나 도리 같은 것들을 저버리게 된다.
2
그렇게 해야만 하냐고 누군가 물어보면, 그렇다.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정직하게 대답하면 다 잡을 수 있는 것들인데,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며 동시에 내 것들로 만들 수도 있는 것들인데, 한편으로는 글쓰기의 세계로 완전히 넘어가려면 다 내가 잡을 수는 없는 것들이란 걸 느낀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설명하기 어렵다. 왜 그런지, 그래야만 하는지, 그게 잘하는 것인지, 그런 것들을 꼼꼼히 물어오는 세계에서 나는 입을 쉽게 열지 못하게 된다. 대신 작은 치와와가 이불 위에 올라가 자기가 쉴 자리를 찾아 비비적거리며 동그랗게 몸을 말아 누이고 킁 하며 자기만 아는 한숨을 쉴 때처럼, 나도, 안길 작은 품을 찾아, 나지막한 한숨을 쉴 수 있는 솜이불 자리를 찾아 낑낑거리며 비비적거리게 된다. 나도, 그토록 최종적인, 치와와의 작은 한숨을 쉴 수 있는 품을 찾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정력적으로 나는 모든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정말 그럴 수는 없다. 내 영혼이 무언가를 쓰는 일에 몰입하면서, 다른 일들을 동시에 다 할 수는 없다. 영혼은 하나의 세계고, 하나의 세계는 하나의 목마름만 가진다. 그래서 나는 하나의 목마름을 해갈하기 위해 하나의 칭얼거림만 가지는 것이다.
3
나는 안다. 최선을 다해 왔다는 걸. 그때그때 나 자신의 마음이 허락하는 한 말이다. 어떤 사람은 마음을 뛰어넘기를 즐기기마저 하는 희망찬 사람이 있지만, 그래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러니까 근원적인 희망을 찾지 못해 버둥거리는 사람에게, 마음의 극복은 너무나 버겁다. 희망을 찾기도 버거운데, 힘든 마음을 극복해야 하는 명분도 없는데, 그래야 하기 때문에 그래야만 한다면, 그런 하루하루는 생각만 해도 질식할 것 같다.
지금 나는 모순이 되는 두 가지 이야기를 동시에 하고 있다. 가능하면서 가능하지 않은 일. 가능하다는 것은 솔직히 말해서 가능하다는 것이고, 불가능하다는 것은 진실하게 말해서, 가능한 그 일은 실은 불가능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진실은 솔직함보다 더 깊고, 그래서 진실이 머무르기에 솔직함의 세계는 비좁다. 그러니까 진실은 진실함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지극적인 배달 비빔냉면 위에 던져진 얄팍한 양념장에는 도저히 머물 수가 없는 무엇이다. 하여 보통은 말없이, 세대를 이어온 평양냉면 집의 밍밍한 육수 속 같은 곳에 잠들어 있다.
4
어쨌든 이 글은, 써야만 하는 것을 써야만 하는 때에 쓰려면 자기의 희생과 타인의 희생을 어느 정도 필요로 하고, 그 일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나 자신에게 이렇게 끈질기게 설명하고 설득하려고 하는 글이다. 어떤 진실들에는 낱개의 진실들과 일대일 호응하는 언어와 개념들을 아직 찾지 못했을 뿐, 반드시 설명되기 어려운 어떤 이유들이 있다고. 아니 처음부터 이유가 없어도 된다고. 그러니 구구절절이 해명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고. 사랑과 진실처럼 진정한 것들은 애초에 궁색한 변명을 필요로 하지 않으니까.
내 영혼이 어디에서도 쉴 수 없을 때, 시간이 자꾸 산발적으로 퍼져나가 시간을 붙잡아 가두어 놓아야만 할 때, 자신이 너무 한심해 스스로 나를 도저히 사랑할 수 없을 때, 그럴 때 일종의 영혼의 계약서 같은 이 문서는 방향을 바로잡아 주는 하나의 배경 설화가 되고, 나와 나를 둘러싼 일들의 판단과 이해에 있어 중요한 근거가 된다.
산문의 세계에서 살아가며 구체적인 사정들을 다 이해하고, 그러면서도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럴 때 적어도 나 자신은 나를 설득할 수 있는 논리가 필요한데, 그게 바로 이런 내용들이다.
5
너는 아직 희망을 찾고 있어. 그건 희망을 찾지 못한 사람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망쳐버리고, 그르치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는 것.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규칙들을 성실히 지키는 동안 사람들은 무언가 중요한 걸 잊어버릴 수 있을 거야. 잊어버리고 싶었던 것뿐 아니라 잊고 싶지 않았던 것까지. 심지어 절대로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까지.
영혼을 잊은 채 성실한 사람들은 그것이 위장된 게으름이란 사실을 모를 거야. 한낱, 한심하고 초라한 소시민이 되는 거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시계 토끼처럼. 너는 그러려고 하지 않는 거잖아, 그럴 수 없어 그럴 수밖에 없는 거잖아. 도저히 희망 없이 살 수는 없어 희망을 찾는 거잖아.
그러니까 너는 그때까지 그냥 살지 말고, 뜨겁게 바라봐. 다들 선납한 여행 경비와 일정에 쫓기며 패키지 관광을 하는 동안 너는 여행을 하는 거야. 퍼져버려도 돼. 아니 퍼져야 돼. 꼭 퍼져야만 돼. 일어나지 마. 절대로. 섣불리 설치지 마. 너의 눈빛을 가질 때까지, 빼앗겨버린 영혼을 고스란히 찾아올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