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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연다.

by jungsin




푸릇푸릇하고 하늘하늘한 한 겹 커튼을 젖히고 활짝 창문을 연다. 영원히 잠기지 않는 문고리를 잡아 돌리고, 천진하게 작은 방을 뛰쳐나가 본다.

그러나 이 문은 영원토록 완전히 닫을 수는 없는 고장 난 문이었다. 평생 이렇게 잠기지 않는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방과 사랑의 거실의 경계에서 열렸다 닫혔다 했다. 다 사랑이었다.


호아킨 소로야 1895, <엄마>







1. 사랑



사랑을 정확히 전달받아본 사람은 새로운 세계로 한 걸음을 내디뎌본 사람이다.



으스러지도록 안아주고, 눈 안에서 온 세상의 별빛이 부서지도록 바라봐주고, 치킨의 다리를 건네주고, 바쁜 중에 틈을 내 경양식 집을 데려가고, 체했을 때 가느다란 실가닥을 입술에 물고 스무 개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다 따고는 등을 문질러 주는 것. 단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당연히 자기 자신보다 더 소중히 여기고 끔찍이 아껴주는 태도.



그토록 더할 수 없이 그득한 사랑을 몸소 흠뻑 받아 본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리하여 이곳과는 완전히 다르게 새로운 세계로 한 발짝, 넘어가 본 사람이 있다고 하자. 사랑과, 용서와, 이해를 다 알아버린 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우리는 아직 그가 알고 있는 것을 잘 모르지만, 우리는 아직 잘 모르는 그 느낌을 온전히 소유해 버린, 그러니까 근원적으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오직 사랑으로써 알아버린 누군가가 있다고 하자.



우리가 그에게서 빼앗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가 우리를 보며 부러워할 만한 것은 무엇일까. 그가 갖지 못한 것은 무엇일까.



그에게 부족한 것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우리는 그 한 사람이 가진 마음을 영원히 뛰어넘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자.



그리고 행여 우리가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아 올 수 있다고 하자. 그의 안에서 그토록 영롱하게 빛나는 것을.



하지만 그 빛은 타인 안에서 소멸할 것이다. 그에게서는 빛나는데, 빼앗아 우리에게로 가져오면 빛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는 누구도 빼앗아 올 수 없는 것을, 이 세상을 꽉 채우는 전부를 가져버렸다. 한 번의 생을 통해, 단번에, 영원히 가져버렸다.






2. 이해



한 사람에게 있어, 이해의 넓이란 그가 받은 사랑의 넓이일 것이다. 사랑을 아는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근원적인 초조함을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오해가 적고, 드물게 오해를 하더라도 오해마저 이해하려고 한다. 오해의 과정을 낱낱이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그냥 오해를 오해 자체로 이해하고, 즐길 준비까지 되어있다. 그는 그냥 다 괜찮으니까. 넓으니까. 사랑받아 다 알고 있으니까. 사랑을 알면 다 안 거니까. 심지어 오해마저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다.



하지만 오해하는 우리를 보자. 우리는 왜 오해하는가. 우리는 왜 이토록 가난한 오해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가.



그것을 배우기 위해 다시 그에게로 시선을 돌려보자.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어 보자. 그가 무엇을 바라보는지, 어디에 가서 무엇을 읽고, 무슨 말을 하는지 멀찌감치서 지켜보면서 가만히 좀 있어보자. 그의 말과 행동이 왜, 어떡하다가 자유와 사랑인지. 이승우 작가의 표현처럼 그는 어쩌다가 “사랑의 숙주”가 되었는지(‘사랑의 생애’). 그래서 온 세상을 가져버리고 자유롭게 되었는지. 슬픔마저 그리움마저, 어떻게 그렇게 풍요롭게 소유하게 되었는지.



그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해도 무언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어서, 인격이어서, 우리의 인격적인 목마름은 아직 완전히 해갈되지 않을 것이다. 저 멀리 시원한 분수대에서 튀기는 몇 방울 물방울을 맞고 있다 보면, 갈증은 더 깊어질 것이다. 아예 분수대에 얼굴을 묻고 벌컥벌컥 마시고 싶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을 것이다. 그와의 눈맞춤에 목이 마를 것이다. 안겨보고 싶을 것이다. 그의 얼굴과 손을 만져보고 싶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그의 안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마시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오직, 지극히 개인적인 경로로 사랑을 알 수 있다. 이해와 오해 사이의 광활한 간극을 이해할 수 있다. 사적으로 내밀하게 사랑을 흡수한 한 사람의 비밀스러운 인격을 통해서만, 그것들을 궁극적으로 다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태양광 패널이 태양 에너지를 축적하고 있듯이, 한낮 동안 소실 없이 고스란히 뜨거운 태양광을 받아두고 있다가, 한밤에 보이지 않는 전선을 통해 남김없이, 깜깜한 방의 불을 환히 밝히듯이. 사랑 에너지를 가두어 두고 있는 뜨거운 패널처럼, 우리는 사랑을 가만히 뜨겁게 삼켜 두어야 한다.



완전한 이해, 그러니까 이해의 이데아가 있다고 하자. 완전한 이해는 납득에 목말랐을까, 사랑에 목말랐을까. 이해는 왜 완전해지지 못했을까. 해명이 부족해서였을까, 사랑이 부족해서였을까. 우리에게 정말 결핍되어 있는 것은 이성적 사고력일까 풍요로움일까. 이해력일까, 이해심일까.



오해는 이해를 통해서가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 풀릴 수 있다. 우리가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길은 그래서 사랑뿐이다. 관계도 결핍도 상처도. 해명되지 않은 수수께끼나 다 풀지 못한 분노도, 사실 사랑에 목말라 있는 것일 뿐이었다. 또 허탈하게도, 사랑이었다.



결국 다 사랑의 문제라고 말하면 무책임한 것일까. 아니면 겸허히 사랑으로 눈을 돌리는 태도는 사랑의 무한 책임적 성질에 대한 수긍일까.



어쨌든 내가 경험한 바, 또 내가 내릴 수 있었던 최선의 결론은 언제나 사랑이었다. 사람 사이의 모든 문제의 귀결은, 다, 다, 죄다 사랑이었다.


그러니까 해가 떴을 때 사랑해야 한다.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며, 흠뻑 사랑해야 한다. 사랑의 광합성을 흡족히 해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위험하니까. 오해의 태양이 작렬할 때 언제라도 다 말라 죽어버릴 만큼 약한 동식물들이니까,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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