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ene Grimuad
때로는 빛보다, 어둠에서 편안한 느낌을 받는다. 이유는 모르겠다. 이유를 알 수 없이 좋은 사람이 정말 무의식에서부터, 영혼으로부터 좋아하는 사람인 것처럼 어떤 피아니스트에게 이유를 알 수 없이 끌린다면 그의 음악을 정말 좋아하는 것일 테다.
훼이보릿 피아니스트 중 특히 그런 사람이 있다면 엘렌 그리모다. 정확히 말하면 좋아하게 되고 있는 피아니스트. 정말 좋아하는 이유가 없고, 더욱이 예술적인 관점의 이유는 전혀 없다. 예술적 특징을 지적으로 자세히 집어서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클래식을 알지 못하고. 잘. 알았어도 엘렌 그리모는 정말 그냥 계속 끌리는 피아니스트다.
음악을 잘 알지 못해서인지, 나로서는 그리모의 연주의 특징을 언어로 집어내기가 쉽지는 않다. 국내 피아니스트 중에 베토벤 스페셜리스트인 임현정도 좋아하는데, 그 둘의 연주의 느낌을 대조해 보면 그리모의 독특성을 좀 더 도드라지게 드러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임현정은 인격적인 느낌으로서나 연주의 느낌이나 열정적이고 뜨거운 느낌이다. 그만큼 진하고, 어쩌면 너무 절망적일만큼 무자비하게 진해서 다 부서지고 뭉개지는 느낌마저 느껴진다. 반면에 그리모의 연주는 차갑다. 차갑다 보니 맑고 선명하다. 선명한 한편 감성의 레이어(layer)는 풍성하게 느껴진다.
명랑하지만 음울하고, 음울하지만 그것의 층위는 다양하게 느껴지는 느낌(해석의 문제인지, 인격의 문제인지, 해석과 인격 자체의 느낌이 모두 합해져 그렇게 느껴지는지 모르겠으나 당연히 후자이리라.). 이렇게 비유해도 될 것 같다. 임현정은 태양, 그리모는 달. 9월의 늦은 오후에 뜬, 연하고도 진한 사과 빛깔 달.
그리모는 뜨거우면서도 차갑고, 밝으면서도 어두운 느낌이 있다. 여기서 두 번째 느낌, 양보다는 음에 해당하는 느낌이 중요하다. 커피라면 밝은 과일 맛이 나는 첫맛이 아니라 한 모금을 마시고 난 후 뱃속 깊은 곳과 코 끝에 남는 어딘지 쓰고 어두운 아로마 향기. 잘 지워지지 않는 그 진한 여운이 중요하다.
늦은 오후, 달, 아주 진한 레몬 향, 차가움, 어둠. 그녀가 가진 그러한 분위기에서 나는 은은한 편안함과 막연한 두려움을 모두 느낀다. 이즈음 언젠가부터 나는 무언가를,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에 관심이 많게 되었는데, 이해는 빛만 볼 때는 온전해지기 어렵다고 느끼게 되었다. 빛보다 어두움을, 피사체보다 피사체 뒤로 떨어지고 있는 그림자를 가만히 응시할 때 비로소 이해는 풍성해질 수 있다고 말이다.
밝기만 한 사람에게는 우선은 먼저 끌리는데 그러한 끌림은 깊이가 깊지 않다. 어둠이 없는 밝음은 깊지도, 온전히 밝지도 못하다. 한철 마냥 밝은 것, 그러니까 한창 젊은 시절의 밝음은 반짝 빛나는 밝음이다. 그러한 빛은 너무 짧아서 소중하고 아련하지만, 그것은 한시적이고 한정적이다. 좋아할 수 있지만 사랑할 수는 없는 빛이다.
청춘의 빛은 그 자체로서 아름다운 것이지만, 어둠을 해석해야 하는 숙제를 피할 수 있는 청춘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어둠은 어떤 면에서 오히려 빛보다 본질적이라 할 수 있다. 내가 결정적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느끼는 모먼트가 빛보다 오히려 어둠인 것도, 따라서 그렇게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친한 형제들과 가볍게 대화를 하며 어떤 자매가 좋다고 말하지 않고 치명적이다..라고 말하게 되는 경우(그런 경우가 드물기는 한데), 그 치명성에는 아마 이런 의미가 있었으리라 생각해 본다.
그리모는 태양뿐 아니라 어둠을 함께 가지고 있는 연주자다. 어둠을 표현할 수 있는 연주자는 아마 빛만 연주할 수 있는 연주자보다 더 오래 기억될 것이다. 빛은 그냥 빛나는 것이다. 햇빛 아래 누워있으면, 그냥 햇볕을 온몸으로 받을 수 있다. 잠을 자도 괜찮다. 빛은 그렇게 많은 주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어둠은 그렇지 않다. 어둠은 주의의 집중을 요구한다. 그늘에는 추위가 있고, 추위에 떨게 되면 우리 영혼에는 고통과 고민, 번민, 절망이 짙고 깊게 번진다. 어둠은 치열한 집중을, 어둠은 그러니까 마침내 온 영혼을 요구하고 싶은 것 같다.
롬 8:28 말씀처럼 우리 삶의 모든 것들이 합동하여 선을 이룬다면, 인생이 정말 남김없이 의미 있는 순간들로 이뤄져 있는 것이라면, 어둠을 이해하는 것은 빛을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일 수 있다.
소명의 빛나는 절정과 인생의 정수는 빛보다 어둠에 있으리라고 말할 수 있다. 어둠은 이해를 깊게 하고, 이해는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니까. 하지만 자유로워진다고 어둠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전히 어둠 속에서 한창 헤멜 때일지라도, 어둠에 대해 이해를 하게 되면 영혼에서 독특한 용기가 솟아나는 것을 느끼곤 한다. 어둠이 빛보다 밝아 보이는 착시를 일으킨다면 이러한 연유일 것이다.
어둠이 빛의 변증법적 본질인 것처럼, 아름다움과 반대되는 추함까지 그러나 변증법의 적용을 받는 것은 아니다. 어둠도 아름다워야 한다. 치명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아름답게 빛나는 어둠이어야 한다. 엘렌 그리모의 어둠은 어떤 빛을 반영하고 있고, 빛을 반영한 어둠이 원래의 빛을 덮어버릴 만큼 짙고 아름다워서 그녀의 어둠은 빛보다 조도가 높다. 하여튼 그러니까 치명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