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잃어버린 사람은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현재, 현재, 미래, 미래, 좋아요, 좋아요. 닭가슴살, 근손실, 코어 운동, 스쿼트, 플랭크 몇 세트, 몸과 물질의 풍요와 코딩, 판교. 사람들은 미래와, 미래의 혁신을 위하는 현재를 노래하지만, 과거야말로 내가 매달려야 할 보물의 보고다.
한병철은 매끄러움의 현재성이 지배하는 유행과, 좋아요로 이어지는 현대 정보사회의 정신을 이렇게 비판한다.
“매끄러움은 현재의 징표다. 매끄러움은 제프 쿤스의 조형물들과 아이폰과 브라질리언 왁싱을 연결해 준다. (...) 매끄러운 것은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 어떤 저항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좋아요like를 추구한다. 매끄러운 것은 자신의 반대자를 제거한다. 모든 부정성이 제거된다. (…) 가다머Hans-Georg Gadamer는 부정성이 예술에 본질적이라고 보았다. 부정성은 예술의 상처다.”
- ‘아름다움의 구원’ 중에서.
모기향 냄새를 맡으면 나는, 시골이 떠오른다. 시골 중에서도 외할머니의 시골. 외할머니 집은 마당이 넓었다. 시골의 마당 한 구석에는 여느 시골처럼 지하수를 퍼올리는 펌프가 있었고, 마당 끝, 벽 가에는 키가 큰 진녹색의 식물과, 형형색색의 분홍 빛깔 꽃들과, 키가 작은 나무들 몇 그루 정도가 있었다. 어느 여름밤, 외할머니 댁 시원한 툇마루에 누워 진하게 피어오르는 모기향 냄새를 맡으며 마당을 바라봤었다. 살결에서 아직 우유 냄새가 나는 어린 소년이었던 나는 그렇게 삶을, 뜨거운 여름 같은 것을 마음에 꾹꾹 눌러 담아 놓았었다.
살아있는 것인지, 죽어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는 나도 그런 날들이 있었다.
언젠가부터 모기향의 연기가 건강에 좋지 않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더니 금세 나선형의 모기향을 거의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우리 집만 해도 이미 내가 이십 대였던 무렵부터는 파란색 칩을 끼우고 전기로 향을 피우는 홈키파 같은 걸 썼다. 전기 홈키파의 은은한 향도 제법 좋았지만 나선형 모기향만큼 여름 냄새를 진하게 일으키는 재주는 없었다. 전기 홈키파의 블루칩 냄새를 맡으며 잠들게 되면서는 생에 대한 뜨거움과 뒤숭숭함을 느끼며 여름밤을 뒤척이는 일도 점점 잦아들게 되었었다. 모든 걸 전기 홈키파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겠지만. 우연하게도, 또 시간의 필연을 따라 그랬다.
2층 주택에서 지낼 때 언젠가부터 여름에 밤늦게 집에 들어오면 지하실 집 앞에서 모기향 냄새가 났다. 지하실의 입주자 가족이, 할머니와 고등학생 남학생들이 포함된 대가족으로 바뀌고나서부터의 여름날들이 그랬다. 여름이면 반지하의 집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는 방충망 천이 길게 늘어트러져 있었고, 그 앞에 피워놓은 듯한 모기향 냄새가 1.5층 높이까지 올라오곤 했다.
그 구간을 지나는 열몇 계단 동안에도 나는 꿈을 꾸며 설레 했다. 지하실 집 할머니는 내가 늦게 들어가는 귀갓길의 여름밤이면, 자주 골목 끝 지물포 집 앞 계단에 앉아, 한 손에 부채를 들고 혼자 바람을 쏘이고 계셨다. 어김없이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드리면 늘 그렇게 따듯하고 환한 표정으로 반겨 주셨다. 그 순간만으로도 나는 뭉클해지곤 했다. 지하실 집 할머니가 나는 너무 좋았다. 알 수 없는 여름밤의 꿈이었다. 나도 알 수 없을 만큼 먹먹한 여름날의 순간들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어쩌다가, 우연히, 모기향을 피워놓고 글을 쓴다. 이제야 여름이 왔다. 몇십 년 만이다. 모기향이 피어오르는 여름은. 그러니까, 우연히 들른 다이소에서 우연히 내 손으로 모기향을 사고, 우연히 가스불에 모기향을 붙여 집안에 퍼지는 모기향을 맡으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이렇게 영혼 가장 구석의 기억을 문지르며 글을 쓰고 있다.
이제 모기향은 나에게 차라리 방향제 같은 것이 되어버린 것 같다. 딱 아늑하게 넓었던 외할머니의 시골 마당을 떠올리게 하고, 수박을, 펌프를, 여름을, 별이 진다네를 떠올리게 하는 마술의 연기가, 아니면 정교회 사제의 향로 같은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