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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연주

by jungsin



기자가 유명 피아니스트에게 글이 쉬운지, 연주가 쉬운지 물었다. 피아니스트의 대답은 얼추 이런 것이었다.



“저는 음악가니까 피아노가 당연히 더 쉽다고 해야 하겠지만, 피아노 연주라는 것은 한 번에 처음부터 끝까지 다 쳐야 하는데, 글은 끝까지 수정할 수 있으니까, 피아노가 더 어렵지 않나 생각한다.”



피아니스트의 대답을 듣고서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음악과 글을 동일한 선상에 놓고 답을 내야하는 구도가 애초에 적절한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시 한번, 그녀의 대답에 대한 대답을 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글은 악보가 없는 연주라서 어렵다고.



한편으로는 그 피아니스트가 의미 있는 지경의 글쓰기를 해본 것 같지는 않다고, 최소한 글을 정말 진지하게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단회성과 동시성이란 연주의 특성상, 피아노 연주는 한 번 치고 나면 어쨌든 끝났다는 카타르시스는 있을 텐데. 글을 쓴다는 것은 혼신의 숙고를 기울인 한 번의 연주가 끝나고 나서도, 심지어 한 마디의 연주를 하거나 한 음표를 누르고 나서도, 되돌아가 지우고 다시 쓸 수 있는 수정의 여지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 그 느낌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써도 써도, 쓰고 읽고 쓰고 또다시 읽어도 고치고 싶은 부분이 거의 항구적으로 끝도 없이 남아있다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숙제를 해도 해도, 늘 숙제를 끝내지 못한 것 같은 기분이 미분처럼 남아 있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그런 글쓰기의 감각이 얼마나 신경 쓰이면서도 즐거운 것인지. 그 음악가는 모르는 것 같았다.



자기 영혼의 입을 벌리고 시간의 실을 한 가닥씩 뽑아, 사랑하는 사람의 폭신한 살 품으로 파고들어 찬란했던 시간들을 곱씹어 가며 자기가 뽑은 말의 미로에 칭칭 감기고 뒤엉켜 빠져나오지 못하다가, 그대로 뒤엉킨 실가닥들 속에서 가만히 잠들고, 깨고, 생각하는 고통과 즐거움. 언어의 누에고치가 된 채 그리움과 허물만 남기고 속은 텅 비어버리는 것과 같은 기분.






사랑은 어려운 일이다. 사랑의 대상이나 사랑하는 일 자체를 점점 더 어렵다고 느끼게 된다면, 그것은 ‘정식의 사랑’일 것이다. 무언가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제대로 사랑할수록 그렇다.



그런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보이는, 생각보다 사려깊지 못한 음악가에게 나는 실망할 수밖에. 어떤 예술의 내부를 향해 진지한 태도로 파고들면 진리의 뜰까지는 닿을 수 있을 테고, 그러다 보면 서로 다른 분야의 예술가들이 공통의 본질에서 만나게 되고, 그렇게 똑같이 숙고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을 것 같은데. 그녀는 무엇으로써 피아노를 쳤던 걸까. 그때 즐겨 듣던 피아니스트의 음악이 다 거짓처럼 느껴지고, 그 피아니스트 또한 예술가가 아니라 연주 기예자처럼 보였다면 너무 가혹한 시선이었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우리 안의 예술성의 뇌리를 건드리는 예과적 재능에 비해 그것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문과적 재능이 조금 부족했을 거라고. 실망하고, 그렇게 치부하고 말기에 그 피아니스트의 연주는 아직 너무나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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