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꽃은커녕 이제 겨우 막 돋아나기 시작한 새싹이었는데. 그것의 색깔도 아직 옅은 연두빛에 지나지 않던 때였는데. 그날들의 나는 새카맣게 탄 숯 같았다.
아침 일곱 시에 학교 앞 지하철역 화장실이나 지하철역 뒤 작은 언덕배기의 무덤가나, 아파트 단지 옆 풀밭에 숨어서 초조하게 담배를 피우며 생각하곤 했다. 저 공장 같은 촌스러운 회색 건물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지. 내 인생을 앞으로 어떡할지. 눈물이 나도록 막막하고 먹먹하기만 했다.
그런 때, 작고 까무잡잡한 안경잡이 여자애가 엑스 재팬을 녹음해서 주었다. 여학생들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남학생들과도 우정의 교류가 별로 없던 나에게는 좀 뜻밖이기도 하고 신기한 경험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앞쪽에 앉아서 공부만 잘 하는 줄 알았지, 엑스 재팬이라는 엄청난 예술 세계를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녹음해줄 수 있는 원본 앨범을 그(런) 여자애가 갖고 있으리라고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아무리 내가 홀연히 그 록밴드를 좋아한다고 말했던들, 앨범 전곡을 녹음해서 선물로 주다니. 검은색 학창 생활에 파란 물감을 떨어트린 것처럼 신선한 경험이었다.
온통 감상적인 자기 감정에 함몰되어 공감 능력이 거의 없다시피 하던 나에게도 그건 퍽 선명한 감동이었다. 우리는 테이프 세대였다. 테이프를 녹음하는 일에는 적지 않은 정성이 들어간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앨범을 녹음하려면 듀얼 데크가 있는 카세트가 있어야 하고, 또 엑스재팬 테잎이 있어야 했다(그때는 아직 일본 문화의 수입 제한으로 일본 뮤지션 앨범 자체를 구하기 쉽지 않은 때였을 것이다). 그리고 공테이프를 사야 하고, 시간을 들여 테이프를 뒤집어가며 녹음을 해야 했다.
그애는 테이프에 붙인 스티커인가, 줄이 쳐져 있는 플라스틱 케이스 안의 표지에 앨범 전곡의 제목을 순서대로 써서 주었다. 녹음을 해준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랐던 생각은 이번에는 너구나 하는 생각 같은 것이었다. 프랑스어과 여자애처럼 너도 나를. 그런 생각이 살얼음처럼, 아니 빙하 정도의 두께만큼 들었던 것 같다. 평범한 남학생의 생각 회로가 그랬다. 하지만 그애는 음악을 좋아하고 착했던 것이었을 터다.
엑스 재팬 녹음 테이프나, 까무잡잡하고 조그맸던 여자애나, 지하철역 화장실에 숨어 자욱하게 내뿜던 필라멘트나, 삐삐 사서함 음악이나, 저녁 급식 줄이나. 다 싱그러움이었다.
무심한듯 테이프를 건네면서 앨범에 대한 약간의 설명을 보탰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 그애가 한 번 환히 웃어보였는데, 솔직히 좀 흔들렸다. 그토록 사소한 지점에서 며칠, 또는 한 몇 주 정도 테잎을 틀어놓고 좀 뒤척였던 기억도 난다. 그렇다고 내가 답례를 한다든지, 그애와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에 대화를 한다든지 하는 일은 역시 없었다. 그때 나의 무뚝뚝함은 어느 정도는 진정한 것이었고 어느 정도는 내적 수줍음을 들키지 않기 위한 껍질이었다. 열일곱, 열여덟의 나는 A4 용지처럼 하얬다.
한편으로 나는 학교에서는 책상에 엎드려 있기 바빴다. 학교 생활은 재미없을뿐 아니라 노상 졸려서 미칠 지경이었다. 마침내 9교시가 끝나고, 저녁 급식을 먹고(또는 그마저 거르고) 야간자율학습을 시작하기 전, 선생님들이 퇴근을 하면 나도 퇴근을 하곤 했다. 짜릿한 담타기를 해서 고등학생 밀집 유흥가를 향해 씩씩하게 걸어나가는 순간에 이르면, 그제야 몸에 피가 도는 것 같았다.
놀던 동네의 여고 여학생들이나 그 동네까지 원정 일탈 여행을 온 실업계고 여자애들과는 그나마 말을 섞어도, 같은 과 범생이 여자애들이라니. 나에게 그건 일종의 부끄러움이자 자기 배신이었다. 어울려 놀던 몇몇 과 남자애들에게도 면목없는 일이었고.
그리고 원래부터 그애는 내 타잎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내 엑스 재팬 테잎 따위는 잊고 정신 차리자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청소년기의 나는 당연히 특별한 눈이 없었다. 그러니까 뭐, 하얗고 뽀얗고 말갛고 찰랑거리고 그렁거리는 그런 여자애가 아니면 눈에 안 들어오는, 시시한 남학생이었다 그때의 나는. 그에 비해 그애는 이미 그때 자기 앞가림을 똑부러지게 할 수 있을만큼 스마트할 뿐 아니라 자기만의 독특한 예술적 취향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즈음 왜 부쩍 그때가 생각날까. 그 시절의 나를 그리워 하고 있는 것일까. 그때는 하루하루가 너무 길고 학교만 졸업하면 온세상에 못할 것이 없을 것 같았는데. 엑스 재팬 녹음 테이프나, 까무잡잡하고 조그맸던 여자애나, 지하철역 화장실에 숨어 자욱하게 내뿜던 필라멘트나, 삐삐 사서함 음악이나, 저녁 급식 줄이나, 다 싱그러움이었다.
잠깐 파랑 물감이 튄 그런 날들 이후, 나는 엑스 재팬의 엔드리스 레인을 들으며 요시키의 눈 밑 마스카라까지 따라하며 더 격렬히 방황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