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좋지 않은 컨디션으로 몇 날 며칠을 보냈다. 가까스로 밤에 잠이 들고 아침에 새소리를 들으며 일어나던 날들로 일으켜 세웠는데.
주일 오후에 교회를 가거나 약속이 있거나 간혹 일일 아르바이트를 한 날은 밤늦게 들어오곤 했다. 그러면 나는 드디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밖에서 말을 하고 활동을 하고 햇볕을 쏘여서인지 노곤해져 쉬다가 잠이 들고 만다.
야간자율학습 시간까지 학교에 있다가 열 시 반에서 열 한시 사이에 집에 들어와, 이제 신나게 놀고 싶은데. 그렇게 잠깐만 쉬자고 누워 하고 싶은 것들을 꿈꾸다가 잠이 들고 말아 늘 억울해했던 고등학교 때처럼 말이다. 그날들과 지금의 차이는 그러고 나서 아침 여섯 시 반 안에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오후 여섯 시 반이나 아니면 다음 다음날 아침 여섯 시 반에 일어나도 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즈음은 밤에 잠들면 새벽 세 시 반에서 네 시 사이 정도에 일어나게 된다. 일찍 일어나긴 했는데, 너무 일찍 일어났다. 영 마음과 몸에 힘이 없다. 해야 하는 일들이 분명히 있는데, 하지 못.. 않는다. 나는 어떡하지 생각하다가, (엄마 말처럼) ‘소득’ 있는 일을 하지도 않고, 멍하니 음악이나 강연, 또는 간혹 설교 같은 것을 들으며 쉬거나 소모적인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늦은 오전이나 오후가 되어 버린다. 그럼 그때는 이제 확연히 피곤해지고. 그제야말로 누워서 쉬어야지 하는 본격 결심을 하게 된다. 너무나 피곤해진 명분이 있으니까, 그리고 난 어떤 활동과 도약을 위해 잠깐만 쉴 거니까, 오후에 누워 쉰다는 죄책감도 덜하다.
그리고는 오후 다섯 시, 여섯 시, 일곱 시, 여덟 시, 아홉 시 중 어느 시간에 깨어나 비로소 아침과 같은 기분을 맞는다. 그리고 다시 씻고, 먹고, 외출을 하거나 안 하거나. 그 사이 운이 좋으면 글 한 두 개 정도를 꾸역꾸역 쓰는 식의 패턴들. 하지만 나는 잘하고 있다. 잘, 살고 있다.
이런 날들이 계속되어도 되지 않아도 상관없을 만큼, 나는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웠다. 내 마음에 있는 예민하고 섬세한 균형추가 나에게 면죄부를 준다. 균형추의 반대편 저울 접시에는 나의 어둠과 불안과 슬픔이 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살아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등에 관한 갈등과 좌절, 분노, 아픔 등이 있다.
그리고 저 반대편에 있는 추는 이러한 어둠의 궁극이다. 내쪽에 있는 추도 어둠인데 저쪽에 있는 추도 어둠이다. 어둠을 어둠이 저울질하고 있는 것이다. 저 편의 추, 그러니까 ‘어둠의 어둠’은 이편에 있는 추의 접시에 올려져 있는 어둠의 근원이자 해석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다름 아닌 내가 믿고, 기대를 걸어오던 절대자.
그 어둠을 나는 평생 빛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도무지 조금도 알 수 없는 빛이어서, 또는 드러내고 빛나지 않는 빛이어서, 또는 이렇게 내 존재를 잠식할 만큼 거대한 어둠의 그늘을 드리우는 빛이어서, 차라리 어둠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아 나는 그 빛을 어둠이라고 부르고 만다. 평생 빛이라고만 불렀던, 그 눈물겨웠던 빛을, 차라리 어둠이라고.
그리고 저편의 어둠. 그 어둠이 유일하게 위안이 되는 순간이 있는데. 늘, 그리고 이즈음처럼 나의 어둠과 죄악이 절정에 달하고, 날마다 절정의 절정을 갱신하고 있는 날들조차도, 어쩐지 그것을 허용해주고 있다는 기분이 드는 순간이다. 그 어둠은 나의 어둠에게 어떤 어리둥절한 적막과 침묵으로써, 이상하게도 끝도 없이 한도 없이 괜찮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것을 느낄 때, 저기 칠흑같이 새까만 어둠의 커튼 뒤에서 누군가 실수로 커튼자락 끝을 밟으며 후두둑 뛰어 지나가 커튼이 흔들리는 것과 함께 미광을 본 것만 같지만, 그 어둠은 아직도 아득하기만 한 어둠이다.
아득한 추는 이렇게 말한다. 위 사람은 아무리 되는대로 살아도, 괜찮음. 적어도 지금은 괜찮음. 아니 언제까지나 괜찮음. 그는 이럴 수 있는 자격과 명분도 있음. 그러니까 아무도 건드리지 말기 바람. 위 사람을 건드릴 수 있는 권한은 이 어둠의 절대자인 나에게 한함.
완벽하게 기울어진 어둠이다. 이쪽 추에서는 아무리 방방 뛰어도 꿈쩍도 하지 않는, 가늠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한 무게를 가진 어둠의 추.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토록 불안한 기울기의 균형추 덕분에 이런 날들에 대해 나는 마음 깊이 죄책감을 느끼지도, 스스로 자신을 다그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 어둠에 나는 익숙해지고, 편안함마저 느껴가고 있다.
심지어 이 어둠은 지혜가 되어 주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 어둠을 이해하는 사람들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궁극적으로 저편의 어둠을 이해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가늠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것을 좀 성급히 과단하면 진정함과 비진정함, 깊음과 얕음 등으로 퍽 뚜렷하게 이미지화되기도 한다(나 역시 이쪽과 저쪽의 어둠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인양. 오만하게도 그렇게, 어둠의 심판자가 되곤 한다.).
지금은 이쪽 편에 있는 어둠의 추들이 아무리 무거워도 저편의 추는 요지부동도 하지 않는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더 격렬히 아무렇게나... 아. 모르겠다. 아무렇게나 하고 싶은 것은 정말 아닌데. 이상하게도 아무렇게나 하게 된다. 또 이렇게 해도 괜찮다는 생각들이 반복되는. 그저, 그냥 그런 시간들이다. 거창한 의미도 없고, 저쪽 어둠에 비하면, 거창한 어둠도 없는.
이렇게 또 새벽 세 시 반. 밖에서는 놀랍게도 뻐꾸기가 운다. 산 가까운 동네는 이렇게 밤에 뻐꾸기가 우는구나. 새까만 밤의 고요 속에서, 그러나 결코 그것을 흐트러트리지는 않고, 그것과 어우러져 낭랑하게 우는 밤 뻐꾸기 소리. 그 작은 소리에도 금세 잠깐 달콤한 기분에 스며들어, 나지막이 생각했다. 이런 게 진짜 삶에 가까운 무엇이 아닌지. 나는 힘들었던 한두 해 동안 무엇을 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