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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처럼 쌓아 올린 또띠아 토핑

by jungsin




드디어 글쓰기의 공간으로 들어왔다.

드디어.

이 순면 같은 질감의, 미백의 캔버스에 당도했다.



어제는 자취하고 있는 곳에서 가까운 한 지인의 가정에 초대받아 여유로운 식사와 망중한의 대화를 즐기다가 새벽녘에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화이트 머스크 향의 바디워시로 샤워를 했다. 최근에 샤워기 헤드를 떨어트려서인지, 수압이 약해진 샤워기를 통해서 졸졸졸 흐르는 찬 물로 여름밤의 열기에 달궈진 몸을 식히고, 바람 힘이 센 공기청정기와 써큘레이터와 미니 선풍기 세 개를 동시에 틀어놓고, 마침내 부드럽고 얇은 요 위에 몸을 뉘었었다.



드디어 캄캄함의 세계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나를 숨길 수 있었다. 새벽 공기가 제법 차서 아스라이 들어오는 듯한 상쾌한 공기와 함께 아득한 기분에 빠져들었었던 것까지 기억난다.



그리고 깨어났다.

아직 캄캄했지만 왜인지 깊은 밤 같지는 않은 밤. 시간을 보니 겨우 다섯 시 정도였다. 주의 깊게 느끼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힘든, 아주 옅은 미명이 밝아오는 새벽이었다. 그리고 다시 잠들지 못한 채 뒹굴거리다 점점 허기짐이 찾아왔다. 어제 그렇게 먹은 음식을 나의 내장은 또 이렇게 빨리 다 잊어버렸다.







하얀색의 순대볶음과
아이들이 손수 토핑을 얹어 오븐에 구워 내놓은 또띠아 피자와
아포가토와
달콤 시큼했던 자두.




어제저녁을 돌이켜 보면, 나는 정말 오랜만에 여유로운 태도로 식사를 한 것이었다.

아이들이 한참 크고 있는 단란한 집에서, 처음 보게 된 청년들과 마주 앉아, 아직도 앳된 부부의 환대와 바지런한 식사 봉사와 함께 한 저녁이었다. 하얀색의 순대볶음과, 아이들이 손수 토핑을 얹어 오븐에 구워 내놓은 또띠아 피자와, 아포가토와 달콤 시큼했던 자두로 이어진 하우스 파인 다이닝. 그 속에서 나는 마치 프랑스인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과 한 테이블에 둘러앉아 공백 없이 네댓 시간 동안 이어지는 식사와 약간의(?) 술과 농담과 웃음과 토론까지 즐겼다.



아늑했다.

아늑해서 아득했다. 그곳에서 나는 왜인지 자꾸 아득해졌다. 그때는 들뜬 분위기여서 꼼꼼히 느끼지 못했지만, 지나고 생각해 보니 내가 느낀 아늑함의 토대는 그곳이 식당이 아니라 집이었던 것에 있었다.


아빠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하는 어린 딸과, 장난스러운 행동들과 함께 호기심 어린 질문을 쏟아내는 더 어린 아들.

그 장면들은 봄이었고, 초여름이었다. 아직 변함없이 겨울인, 아니 갈수록 더 혹독한 한 겨울인 나의 영혼과의 극적인 대비였다. 푸릇푸릇한 생기의 아이들과 달그락거리는 그릇 소리. 그리고 이따금 오고 가는 농담과 가족 안에서만 오고 가고 이해될 수 있는 시선과 신호들. 투정, 웃음, 훈계와 애정 서린 호통과 손님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새 틈틈이 있었을 쓰다듬음 같은 것. 그것들은 틀림없이 다 사랑이었는데. 추상으로써의 사랑조차 자신이 사랑의 주체와 대상인 사람은 아니니까 사람을 질투할 것만 같은, 사랑의 알파와, 오메가와, 이데아였다. 위풍당당한 사랑의 위용. 사랑의 위무.



그 속에서 아직 각자의 결로 방황하는(키에르케고르 같은 책들이나 보며) 싱글의 청년들과 나만 서걱거리고 있었다.







창 바깥으로 느껴지는, 더위가 한창일 팔 월 둘째 날의 여름 아침 공기가 뜻밖에 제법 선선하게 느껴졌다. 이른 아침부터 온 동네의 풀벌레와 매미가 합창하듯 울었다. 풀벌레 콰르텟과 매미 솔로이스트의 콘체르토 곡이 시원하게 실내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따금 강아지 집사님을 동반해 산책하는 작은 강아지가 짖는 소리까지 들렸다.



나만 빼면, 완벽히 평화로웠다. 그러니까 이런 아침은 내가 아주 고요하고 달콤한 상황 속에 있다는 착각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었다. 보통은 쉴 때도 글을 쓸 때도 거의 반사적으로 음악을 틀어 놓는데, 바깥공기와 함께 방 안으로 스며들어오는 소리가 달게 느껴져, 새삼 고요 속에서, 바깥소리에만 의지해 글을 써보고 싶어졌다.



어쨌든 한편으로 허기는 달래 놓아야만 할 정도로 절박해지고 있었다.

부드러운 도자기색의 큰 머그 안에 요거트를 부어 담고, 그 위에 흰 설탕을 한 수저 담뿍 퍼서 뿌리고, 그 위에 시리얼과 고구마 과자를 부어서 아그작아그작 퍼먹다가, 여전히 허기져 다시 우유를 붓고 또 시리얼과 고구마 과자를 부어서 퍼먹으면서, 나는 이즈음 고단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자신과 자신의 날들을 되뇌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아주 근원적인 상념의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지금, 그러니까 지금의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에게 지금 남아있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갖고 있는 것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하는 간명한 물음이 부유했다.



그렇게 있다가 엄마가 생각났다. 이내 그대로 엎드려 손바닥을 펴고 이마를 묻고 울고 말았다. 손바닥을 눈에서 떼자 두 광대 뺨에 머물러 있던 눈물방울이 후두둑 방바닥으로 떨어졌다.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다시 얼굴에서 손바닥을 떼기까지는 아주 찰나였는데, 그 사이 눈물 수도꼭지가 열려 염분 섞인 물이 흘러나왔다.



새벽부터 정체 모를 시리얼과 함께, 이렇게 울보 인증을 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삶의 느낌은 아직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다른 글에서도, 학교에서도, 친구들 사이에서도 느껴본 적이 없는 아침 기분이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런 시간들이 가지는 독특성의 기원은 경험과 감정뿐이 아니었다.

그것은 더욱 본질적으로, 생각의 변화였다. 내가 어떠한 토대 위에 있는지, 무엇의 태양계를 빙글빙글 돌며 살고 있는지 인생에서 이토록 분명하게 느끼며 살아있는, 살아가고 있던 날들은, 다시 또 없었다. 모든 것이 놀라울 만큼 분명해지고 있다.



시린 한 겨울로 아득히 들어갈수록, 봄이 무엇이었는지, 여름이 무엇인지 더 선명해지는 것처럼.

이제 내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답만 내리면 될 것 같다.






그러니까..


나에게 남은 것,

변함없이 남아있을 것,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

덜 마른 채 세탁기에서 꺼내지 않아 진하게 배어버린 빨래 냄새처럼, 깊이 배어버려 사라질 수 없는 냄새 같은.

너무나 인간적은 토대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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