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슬픔과 광기
1. 글쓰기 플랫폼의 역설적인 감각들
나는 한글 문서보다는 글쓰기 플랫폼 자체를 켜고 글쓰기를 더 즐긴다.
첫째는 외로움 때문이다.
왜인지 글쓰기 플랫폼에 들어가서 쓰는 것이 한글 문서에 쓰는 것보다 덜 외롭다. 플랫폼의 온라인 문서 작성 폼에 들어가서 쓰면 카페나 도서관에서 쓰는 것처럼, 마치 누군가가 함께 있는 공간에서 쓰는 느낌이 든다.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내 목소리가 들릴 수 있는 건너 방에 조수 한 명은 두고 쓰는 느낌이 든다.
그에 반해 하얀 한글 문서는 너무 사무치게 외롭게 느껴진다. 하얀 화면이 왠지 너무 쓸쓸하고, 창백하다.
정말 안 그래도 이미 외로운 날은, 아무리 글이 쓰고 싶어도 노트북을 켜고 한글 프로그램의 하얀 문서 화면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턱 막혀 도망가고 싶을 정도로, 한글 문서는 나에게 때때로 긴장과, 외로움과, 막막함을 안겨준다.
둘째로는 퇴로 차단하기의 효과를 위해서다.
한글 문서에 쓰다 보면 지뢰게임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 옛날 윈도 컴퓨터 시절에 기본으로 저장되어 있던 지뢰게임을 혼자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빠져들고, 빠져들어 한동안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면서 현타가 오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 나는 그냥 지뢰 게임 프로그램 자체를 비인격적으로 확 꺼버리곤 했다. 한낱 게임 프로그램이란 원래 비인격적인 것이지만, 더 잔인하게 비인격적으로 꺼버리는 것이다.
왜 그렇게 느껴지는지 모르겠지만 한글 문서에 글을 한동안 쓰다 보면, 나는 그때와 비슷한 권태감과 외로움을 느끼곤 한다. 그러다 그 감정은 지뢰게임에서와 마찬가지로 분노로 바뀐다. 그렇지만 지뢰게임과 다른 점은 글이 아까워서 저장하기를 꾹 누르고 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미 분노와 지침, 불쾌감에 이른 상태에서 저장하던 차라 제목을 아무렇게나 쓰고 저장하고는 한다. 예를 들면 ㅁ노ㅑㅕ홍먀ㅕ노아머노 라든지, 2023-8-5처럼 말이다.
그렇게 저장한 글이, 추후에 다시 열릴 가능성은 통계적으로 희박하다. 혹여 추후 다시 이어서 쓰기 위해 그 글을 찾으려고 해도 아무렇게나 저장한 글을 찾기도 요원하고 말이다.
또 한글 문서에 글을 쓰면 글을 끝까지 쓸 확률도 낮아진다. 글쓰기 플랫폼에 쓸 때는 조금 더 임박한 목적 정신이 느껴진다. 글쓰기 플랫폼 안에서의 글쓰기란, 내가 쓸 글을 이대로 업로드하면, 읽을 사람들이 바로 이 문 밖에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나는 두 테이블 정도가 놓인 작은 비스트로의 셰프이자 사장이고, 아침부터 몇 팀의 손님들이 줄을 서서 오픈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따라서 나는 임박한 책임감을 갖고 아무리 지치고 피곤해도, 어떻게든 오픈을 해야만 한다.
그렇게, 쓰기 시작한 거 이왕, 어떻게든 마무리를 지어서 발행을 해버리겠다는 퇴로 차단의 정신이 깃든 채로 쓰게 된다. 집요하게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끝까지 완벽히 써내든, 대충 서둘러 봉합을 하든 말이다. 긴박함과 절박함에 자신을 가두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글 프로그램에 쓰면 이상하게도, 언제라도 다시 쓰면 그만이라는 느낌이 마음의 한 모퉁이에 있는 채로 글을 쓰는 느낌이 든다. 왜인지 이 안전한 문서 프로그램은, 글을 쓰다 말고 저장해 두었다가 다시 쓰면 그만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한글 문서의 늪에서 한참을 쓰다 보면 어느새, ‘완결을 맺지 않아도 되니까 일단 저장만 해. 괜찮아.. 뭐 그렇게 퍽퍽하게 살아?’ 어느새 그런 달콤한 목소리가 귓가에 다가와 속삭인다.
그것은 모래흙에서 두꺼비집을 짓듯이, 읽을 사람 하나 없는 글을, 언제라도 운동화로 밟아버리면 사라질 지난한 언어들을, 그냥 하염없이 쓰고 있는 느낌 같은 것이다. 적어도 누군가에게 읽히도록 쓰는 기분은 아닌 것이다.
이런 이유들로, 한글 문서에 글쓰기는 여러 모로 취약점을 갖고 있다.
글쓰기 플랫폼에 직접 글쓰기는 이런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으니, 그것은 증발되어 버릴 위험이다.
글쓰기 플랫폼의 문서 작성 툴은 사실 어느 정도 날아갈 위험을 갖고 있다. 인터넷 연결 장애나 조작 미숙 등, 예상치 못한 상황과 원인에 따라 통째로 글이 날아가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글쓰기의 외로운 느낌을 덜어보려 하는 동시에 글쓰기 플랫폼의 불안정한 느낌을 오히려 즐기기도 했던 것 같다.
글쓰기 플랫폼에 직접 글을 쓰는 느낌이란 마치 버스킹을 하는 느낌과도 같았다. 노래 실력은 아직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오늘의 목 상태도 아직 불분명하고, 노래를 부르면서도 어떻게 될지 아직 알 수 없지만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으로 살아있는 현장에서 노래를 부르는 즐거움.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에 찾아가, 길거리 한 모퉁이에 자리를 잡는다. 장비를 펼치고, 앰프를 켜고, 마이크를 연결하고 소리 내어 불러본다. 목 컨디션도 전혀 완벽하지 않고, 아직 레퍼토리를 완벽히 정하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사람이 붐비는 곳, 누군가 들어주는 사람이 있는 광장에 가서 찬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느낌. 그런 생생한 느낌을 느끼면, 혼자 있어도, 혼자 써도 덜 외롭게 느껴지는 것 같곤 했다.
2. 달콤 쌉싸름한 증발의 역사
최근에도 나는 노트북을 열고, 투비컨티뉴드에 들어가서 글을 쓰고 있었다. 그날따라 왜 그런지 글이 정말 잘 써졌다. 단문으로도 할 말이 다 표현되면서, 행간의 과즙도 감칠맛 나게 살아있었다. 내가 쓸 수 있는 글 이상의 글이 써지고 있다고 느꼈다. 그렇게 스스로 짜릿함을 느끼며 한참을 계속 쓰다가, 어느새 마무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발행을 코앞에 두었다.
이제 발행만 하면 되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이제 거의 마지막으로, 수정하고 싶은 부분이 눈에 띄었다. 그래서 해당 부분에 커서를 올리고, 지우고 다시 쓰기 위해서 백스페이스를 눌렀다.
그리고...... 페이지가 뒤로 넘어갔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어?.. 에이.. 설마..’ 순간적으로 혼잣말을 했다. ‘아니지? 에이, 아니라고 해..’ 계속해서 혼잣말. ‘모지.. 왜 뒤로 갔지? 어.. 주여. 아니죠? 주님 괜찮죠? 다시 살릴 수 있죠?’
나는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계속 중얼거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전에 내가, 크롬 브라우저에서 백스페이스를 누르면 페이지 뒤로 가기를 할 수 있도록 하는 크롬의 확장 프로그램을 설치해 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내가 정확히 수정을 의도했던 해당 글자 부분에 커서를 분명하게 옮기고 백스페이스를 눌렀더라면 당연히 지우려고 했던 글들만 지워졌을 텐데. 아마 내가 맥북의 트랙패드로 커서를 옮기다가 크롬 브라우저 자체를 선택한 채로 백스페이스를 눌렀나 보다. 글이 너무 술술술 잘 풀리다 보니, 글이 막바지를 향해 가면서, 혼자 글이 잘 써지는 그 느낌과 글결을 즐거워하면서 다소, 흥분했던 것 같다.
내가 느끼기에도 그 글은 너무 좋아서 복구해 보려고 한동안 애를 썼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 글을 완전히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 같았다. 결국 나는 기억을 되살려 내가 쓰고 싶었던 내용들을 다시 다 쳐보려고 애썼다.
날아간 글들을 복원하려는 시도와, 포기하고 다시 쓰려는 시도까지. 그야말로 지난한 집념의 과정이었다. 글을 잃어버리고 나서 바로 집중해서 기억해 내려했더니 내용이 거의 다 생각이 났다. 놀랍게도, 정말 그렇게 웬만한 내용은 다 복원했다.
하지만 복원한 것은 내용이지 문장이 아니었다. 즉 하고 싶었던 말의 덩어리 그 자체는 생각이 났는데, 맨 처음 썼던 간명하고 위트 있었던 문장들 그대로를 살릴 수는 없었다. 애써 기억해 복원한 내용들을 다 넣은 글은 덕지덕지 기운 누더기 같았다. 또 이미, 체력적으로도 지친 채 정신력으로 쓴 글이어서 처음 쓴 글의 생기는 온데간데 없었다.
나는 그쯤에서 뒤돌아섰다. 그래, 이 정도 내용 복원한 것으로 됐다. 이제 그만 뒤돌아서자. 나와 타협하자. 글은 그때그때 저장을 해야 한다는 교훈을 배운 것에 -김영하 작가가 언젠가 인터뷰에서 글을 쓰면서 작가로서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중간중간에) 저장하기’라고 말했던가.- 의의를 두자.
이 정도 애썼으면 됐다. 적어도 경험을 에세이로 쓰는 하나의 단락이, 치열하게 연습은 되었으니까. 글이 잘 써진 것을 나는 알고 있으니까. 그만하자.
글이 글이지 뭐. 삶이, 경험이 중요한 것 아닌가. 글이 날아갔어도, 그 경험은 여전히 고스란히 나의 것이니까. 적어도 그 문장들이 나의 영혼에는 새겨져 있을 테니까. 나는 다행인 것의 목록을 자꾸만 쌓으면서, 그런 느낌들을 되뇌며. 그렇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뗐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한 가지를 또 깨달았다. 문장은 마치 한창 자라며 생동하는 아이 같아서 그때, 그때에만 잡아둘 수 있는 문장들이 있구나. 이상하게도 다시 쓰려고 하면 다시 쓸 수 없는 문장. 그런 것이 있는 것이구나.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자라나는 아이들의 표정이나 웃음, 울음을 그때그때 눈에 담아두지 않으면 그 순간은 영원히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문장은 생각난 바로 그때 써야 되는 것이구나.
이후에 나는 크롬의 백스페이스(를 누르면 페이지 뒤로 가기가 되는) 확장 프로그램을 통쾌하고 통렬하게 삭제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글은 외로워도 한글 문서 프로그램에 써야겠다고. 앞으로는, 내 아이를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듯이 유모 같은 플랫폼 문서 작성 폼 따위에 글을 쓰지 말아야겠다고. 소중한 나의 감정과 감각과 생각이 담긴 문장들은, 한 문장의 소실도 막기 위해서 최대한 아늑하고 아득하고 안정적인 환경에서 써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