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달콤쌉싸름한 글쓰기의 증발 2

by jungsin



(부제 : 투비컨티뉴드 편집 툴에 대해서)





얼마 전, 그러니까 싱크대 옆 한켠에 서서 라흐마니노프 1번 글을 수정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너무 배가 고파 늦은 새벽이지만, 밥을-‘정말 밥’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어쨌든 밥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그러니까 내 존재처럼 경계선상의 정체성을 가진 불명의 요리를- 하고 있었다.



전자레인지가 가열차게 돌아가고 있는 동안 나는 바로 그 앞에, 바짝 붙어 서서 요염하게 폰으로 글을 쓰는데 몰두하고 있었다. 몰두의 구체적인 내용인 즉 책상에 앉아서 방금까지 쓰고 있던 ‘라흐마니노프’ 1 부분에 해당하는 어떤 단락에 대한 가열찬 수정이었다.



배가 고파서 일어나 싱크대 앞으로 달려와 서둘러 알 수 없는 요리를 가열하고 있던 만큼, 처음 수정을 시작했던 형태는 전자레인지 옆에서 캐주얼casual하게 고쳐나가던 것이었다. 요리가 데워지고 있는 사이 잠깐 수정을 가하려던, 부대상황의 with 분사구문 형태로, 요리 with 수정의 모습으로 말이다.



그렇게 문득 떠오른 문구나 문장으로 조금씩 고치고 새로 써 넣던 것이, 점점 좋은 문장들로, 내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딱 맞는 표현으로 써지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점입가경으로 빠져들었다. 어느새 수정 with 요리로, 요리가 부대상황이 되었다. 마이크로웨이브 전자레인지도, 글도, 나도 모든 것이 가열되고 있었다. 잘 써진다고 느껴질 정도로 잘 써지고 있었다. 그런 느낌이 실감나게 느껴지는 경우는, 글을 쓰면서 정말 그렇게 흔하지 않다(물론 나만 아는 흡족함이지만.).



나는 껑충껑충 산마루를 뛰어 올라가며 멀어져 가는 황금빛 노루를 잡으러 달려 올라가는 사람 같았다. 머릿속에서 폭죽처럼 떠오르는 문장들의 끝으로 퍼지는 불꽃 하나마저도 주먹 안에 쥐려고 집중해서 쓰고 있었다.



잘 쓰든 못 쓰든, 즐겨 쓰는 사람들은 그 느낌을 알 것이다.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문장의 뒷꽁무니를 숨죽여 따라가면서 노심초사, 한 단어라도 놓칠까봐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적는 순간의 설레면서도 두려운 느낌을. 이렇게 잘 써질 리가 없는데. 이거 내 꺼 맞나. 이 문장들을, 정말 나의 문장들이라고 해도 될까. 그런 생각을 하며 타이핑이, 떠오르는 문장의 속도를 쫓아가기 바빴다.





나는 폰으로 두 개의 창을 열어놓고 쓰고 있었다. 두 개의 창 모두 수정하려는 ‘라흐마니노프’라는 제목의 글에서 수정 버튼을 누른 상태의 창이기는 마찬가지였는데, 하나는 한창 수정 작업을 하고 있는 창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전에 올려놓았던 글이 그대로 고스란히 있는 상태의, 아직 수정을 가하지 않은 상태의 창이었다.



"형이 잘 할게. 투비컨티뉴드 Editing 창아."



끝이었다.


그러다가 수정을 하고 있는 창에서 투비컨티뉴드 에디팅 툴의 기능상 한계의 문제로 두 세 단락 정도가 지워졌다.



위에 보이는 것("끝이었다.")처럼 투비컨티뉴드에서 제공하는 따옴표 인용구 편집 기능 안의 내용을 수정하고 싶었던가, 지우고 싶었던가. 아니면 바로 아래에 있는 단락을 조금 위로 올리고 싶었던가. 그 모든 것을 하고 싶었나. (이제는 그 비극적인 순간이 아득해져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아무튼 나는 정말이지, 그저 선량하게 그 무언가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보통은(예를 들면 브런치 같은 경우) 큰 따옴표 그림 안의 내용을 다 지우면 백스페이스를 계속 누르고 있어도 따옴표 안의 내용만 지워진다. 그리고 끝까지 지워지면 그대로 막혀, 깜빡거리며 커서가 멈춰 서있다. 그런데 이 깜찍하고 스마트한 투비컨티뉴드 편집 툴은 따옴표 안의 내용을 지우자 아래 단락의 글이 따옴표 안으로 말려 올라오는 것이다. 기대했던 것은 백스페이스가 따옴표 그림 안에서 왼쪽 끝까지 작용하고 나서 커서가 멈추는 그림이었는데. 공장 기계에 소매깃이 말려 들어가듯 아래에 있는 따옴표 밖의 내용이 따옴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럴 수 있지.

원래대로 복원해 놓을 수 있겠지.

다시 따옴표 밖으로 내려 놓으면 되지.'



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따옴표 안으로 말려들어온 단락들도 백스페이스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부 내용이 속절없이 지워지고 말았다.



문제는 투비컨티뉴드 글쓰기 편집 기능이 ‘한 단계 뒤로가기’ 또는 '한 단계 앞으로 가기'가 원활하게 잘 안 된다는 것이었다(아이폰에서는 거의 둘 다 작동되지 않는다. 가끔 바로 이전 단계로까지만 뒤로가기가 될 때가 있는 정도다. 맥북에서는 '뒤로가기'는 되지만 '앞으로 가기'는 안 된다.).



맨처음에 글을 쓸 때는 자동으로 임시저장이 되는 기능이 있어서, 쓴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글은 얼마 전까지 쓰던 내용까지에 한 해서는 그대로 복원할 수 있다(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면 되니까.). 하지만 한 번 발행을 하고 차후에 ‘수정하기’ 버튼을 눌러서 다시 들어와 수정을 하고 있는 글은 지워지면, 끝이었다.




'끝'




다행히도 일부가 따옴표의 블랙홀 속으로 사라진, 그 단락들은 내가 가열차게 수정을 하고 있던 부분이 아니었다. 원래 글은 그대로 있으니까, 원래 글에서 그 단락들을 복사하기 해서 가져오면 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도 아직 큰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그래서 손쉽게 다른 하나의 창에서 그 단락들을 가져와 지워진 부분은 그대로 복구를 했다. 그런데. 그렇게 수정하고 잘라넣기와 붙이기를 하고 그러한 복잡한 과정에서- 내가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못하는 어떤 이유로-따옴표 안의 내용을 지우려고 백스페이스를 계속 누르고 있다가 따옴표 윗 부분에 있던 문단들까지 지워졌었던 것일까. 지금은 미스테리가 되었다.- 그렇게 잘 써졌던, 내가 쓰고 싶은 문장들이 알알이 다이아몬드처럼 그렇게 콕콕 박혀있는 문단이 수정 이전의, 원래의 원시의 상태 그대로 바뀌게 되었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왜일까. 왜였을까. 왜 가장 잘 써진 글은 대기 중으로 사라져 버릴까. 왜 나는, 나는.

왜 이럴까. 세상은 왜 이럴까.



너 살아있지. 너 사람이지. 너 숨어있다가, 내가 좋은 글이 써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내가 글 잘 쓰고 있는 것 같을 때, 내가 좋아하는 것 보고 그 부분만 빼내서 입 벌려서 얌얌 삼켜먹는 거야? 너, 꼭 이럴 때만 글이 날아가더라? 너 누구야. 나 이거 진짜. 유일한 낙이야. 진짜, 상도라는 게 있지. 인간적으로 우리 이러지 말자. 나는 또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피곤해졌다. 도저히 그 부분을 바로 복원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우회하여, 결국 앓아 누워 폰과 태블릿을 들고 분주하게 이것저것 다른 것들만 하고 놀다 지쳐 잠이 들고 만다.



그 느낌이 꼬박 이틀째인가, 체한 느낌으로 얹혀 있었다. 그러다가 방금에서야 애써 기억해 내려 미간을 찌푸리며 당시의 느낌을 생각해보면서 몇 문장을 새겨 넣어, 해당 단락을 어느 정도는 복원했다. 그러나 전소되었던 남대문이 복원한다고 이전의 남대문으로 복원되는 것은 아니듯이, 그 단락을 처음에 수정하며 빛나는 문장들을 아로새겨 넣을 때처럼 개운하지는 않았다. 다 애써 복원하고 나서도, 그 문장과 단어의 맛들을 그대로 살렸다고 느끼며 뱃속에서, 문장들을 쓰고 난 뒤 후미(後味 뒤 후, 맛 미)가 기분 좋은 감칠맛으로 남아있지는 않았다. 어딘가 텁텁했다. 그 곳에 다시 그리 쉽게 눈길이 가지 않았다. 엄마가 튿어진 곳을 어거지로 기워서 꺼내입기 싫어진 옷처럼 말이다.



역시 *지난 번에 언급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 순간에만 살아 펄떡이는 문장들이 있어서, 그런 것은 그 때 잡아서 생포해 그대로 새겨넣지 않으면 사라지기 마련이기에.







* 지난 번의 언급이란,

아래 글을 참조.



달콤쌉싸름한 글쓰기의 증발 : 투비컨티뉴드

https://tobe.aladin.co.kr/n/88485




작가의 이전글가장 악질적인 게으름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