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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악질적인 게으름에 대해서

by jungsin



나를 안식할 수 없도록 하는 주요한 일들이 몇 가지가 있다.

그중 매우 악질의 주범이자 상습범인 범인은, 쓰지 않는 것.


써야 할 것을 쓰지 않는 것.
잠시만 다른 일을 먼저 하고 나중에 쓰면 되지.
이 감각을 기억하고, 다른 일들을 하고 책상에 앉으면 이 느낌들이 살아나 고스란히 다 쓸 수 있겠지.
내가 얼마나 똑똑한데 말이야.

쓰고 싶다고 마음에만 새겨 놓았던 글의 조각들을 미루고, 또 미루다가.

그리하여 마침내 내가 만질 수 있는 세계에서 사라지도록 하는 일은 나를 아프게 하여 쉬지 못하게 한다.


그런 일은 아주 아주 오랫동안 나를 그 느낌의 감옥에 가둔다.
무엇인가, 아주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느낌.

그런 감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한다.
괴롭게 한다.
아주 오랫동안 나를 쉬지 못하도록 한다.




쓰는 사람이 쓰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게으른 일이다.

써야 할 것을 미루는 것은 빨래나 청소를 미루는 일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게으름이다. 질이나 강도로써 따지자면 그것은 훨씬 더 질이 좋지 않고, 강한 강도의 게으름 같은 것이다. 쓰기를 기뻐하는 사람, 또는 쓰기를 힘들어하더라도 써야 하는 사람이라면 어쨌든 써야 한다. 써야 할 것을 쓰지 않는 것은 가장 질이 좋지 않은 게으름이다.



실은 이 이야기를 주제로 새벽녘부터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슬아슬, 책상에 앉을 듯 말 듯. 미백의 흰 문서 캔버스에 닿을 듯 말 듯. 그러나 난 수많은 우회를 하다가 또 지쳐 누워버렸다.



초점 없는 눈.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마음 상태. 못 봐줄 몰골을 하고 옆으로 누워 김겨울의 활자 안에서 유영하기란 책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오랫동안 짝사랑하는 여자에게 실연을 당하고 세상을 모두 잃어버린 듯 튜브에 엉덩이를 넣고 스티로폼 조각이나 쭈쭈바 껍데기 등과 함께 파도에 떠밀려 다니는, 맥없는 청춘 피서객처럼 책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멍하니 읽어 나가며 ‘희망 찾기’ 또는 ‘책에서 마음의 힘을 줄 계기 찾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또다시 ‘지금 하지 않으면’이란 한 구절을 떠올렸다.



내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것. 잃어버리는 느낌. 이즈음 나는 그것을 외할머니 댁 마당에 있던 펌프처럼 사용하곤 한다. 나에게, 상실의 감각이 하나의 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나는 하여 기꺼이 그것을 끌어안았다. 잃어버림의 두려움을 동력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얻기 위해서, 꿈을 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니. 얄팍하고 괴상한 상술 같지만, 이런 정도라면 선량한 상술이라고 너그러이 불러도 좋다고 생각했다. 이토록 절박한 에너지의 기근과 암흑 속에서, 누군가를 일으켜 세워 빛으로 데리고 나오는 손길이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젖가슴처럼 뭉클한 사랑이다.



또 다시 잃어버리면 안 돼. 지금 하지 않으면 쓰고 싶었던, ‘쓰지 않는 것은 게으름’이란 주제의 글은 영영 쓰지 못할 거야. 난 또 내 언어의 세계의 한 조각을 잃어버리고 말거야. 그리고 나는 한번 더 상실의 펌프질로 벌떡 일어났다. 작은 상(주 용도는 밥상이다.) 위에 올려져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는 노트북을 열었다. 제이제이의 ‘러브 액추얼리’란 노래의 볼륨을 최대치로 올려놓고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을 썼다(헤드폰을 쓴 이유는 추후에 다시 논하기로 한다. 문을 열어놓고 자유롭게 사는 내게 자꾸 사생활의 영역을 넘나드는 임차인의 사연이 있다.).


베란다를 치워야 한다. 보일러실을 치워야 한다. 집주인 분께 치웠다고 카톡을 보내야 한다. 계약이 종료되어 가므로 이사 또는 계약 연장에 관한 결정을 해서 말해 주어야 한다. 오늘 교회에 같이 갈 두 형제와 연락을 해야 한다. 잠을 자야 한다. 머리를 잘라야 한다. 씻고 외출을 할 수 있는 나의 상태가 되어야 한다. 우울증과의 레슬링에서 우울이 내 허리를 움켜쥐도록 해서는 안 된다. 또다시 정신없이 좌우로 구르며 넘겨져 캄캄한 어둠 속에서 24시간, 48시간, 72시간을 있어서는 안 된다. 나는 사자에게 쫓기는 노루 같은 신세가 되어 있다. 초점 없는 눈동자의 5퍼센트 정도는 그처럼 쫓기는 일들과 우울과의 사투에 관한 것이다.


정말 누가 자그마한 어깨만 빌려주고 머리를 품에 당겨 처박아주면, 목이 쉬도록 울고 싶다. 목이 다쉬어서 목소리가 안 나오도록 목놓아, 한 번만.


그러니까 써야 한다. 무엇이든 낱낱이 표현하고 기록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렇게 씀으로써 최소한의 삶의 의무를 다하는 느낌이다. 자존감의 마지막 뚝을 사수하는 느낌이다. 쓰지 않는 것은 나에게 점점 가장 좋지 않은, 악질의 게으름이 되어간다.



몸에서 숨이 떠나면 몸은 만져질 수 없지만 글은 몸보다는 조금 더 오래 만져질 수 있을 것이다. 혹여 나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내 숨결이 엷게 밴 문장과 단어를 만질 수 있을 것이다.


안식일이다. 안식을 느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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