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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뇨끼

by jungs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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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고요하다. 방금 전까지 김효근 작곡의 첫사랑을 틀어놓고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 음악도 틀어져 있지 있다.


마침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오직 고요한 아침의 공기 소리와 공기청정기의 전기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만 미세하게 들린다.


새벽에는 *뇨끼를 해먹었다(이에 관해서는 언제 한 번 영상 콘텐츠로 만들거나 글로 한 번 써 볼 생각이다).



처음 만들어 본 Tomato Whole source 뇨끼



시제품 토마토 파스타 소스만 넣고 만들었는데, 그렇게 맛있는 소스는 아니었다. 그렇다보니 맛이나 간 자체가 입맛에 딱 맞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애프터 테이스트(후미)가 뱃속에서 젠틀하게 기분좋은 맛을 남긴다.


먹을 때는 어딘지 간이 더 쎘으면 좋겠단 아쉬움이 드는, 담백함과 밍밍함 사이 어딘가에 포지셔닝되어 있는 애매한 맛이었다. 그런데 마치 평양냉면처럼 다 먹고 나니까 맛있는 감칠맛이 뱃속과 입안에 남아있다. 뇨끼란 과연 이탈리아 요리계의 평양냉면인가. 아마 반죽을 수제로 직접 만들어서, 수제 뇨끼 반죽이 건강한 맛을 남기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 이렇게 누워서 글을 쓰면서 조금씩 출출함이 느껴질 때면 입으로 집어넣는, 오븐에 살짝 구워 식감이 바스락해진 시금치 식빵 조각들도 뱃속에 시금치맛 담백함을 남기는 것 같다.


그리고 오늘 아침의 담백함이 뇨끼 같다. 고요하고, 아이들이 모두 등교해서 적막함마저 느껴지는 이 아침.




고등학교 때 한 두어 번인가, 아니면 서너 번인가. 수업 시간에 양호실을 이용한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교내에서 일과 시간에 양호실에 누워있는 기분을 아는가. 정말 짜릿하고 고요하고 평온하고 설레고 불안하고 나른하고 권태롭고 신비한 양호실 매트리스의 기분이란 것이 있다. 친구들은 다 교실에서 수업받고 있는데 한낮에 나만 아늑한 양호실 안에서 양호실의 외벽 창을 통해 떨어지는 햇볕을 받고 호젓하게 누워있는. 그날의 기분은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이 달콤하고, 불안하고, 가슴이 터질듯 설렜다.


너무 피곤하고 교실에 앉아 있는 것은 곤욕스럽기만 한데,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김에, 또는 아프다는 핑계를 댈 수 있는 컨디션(어딘지 불편하지만 다른 친구들 모두 이 정도 안 좋은 컨디션에는 그냥 교실에서 버티는 정도의 컨디션)이 된 것 같은 김에- 그러니까 정직하게, 정말 아픈 것은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면 안 될 것 같지만, 그런 애매한 기회를 빌미 삼아- 어쩌면 열이 난다고,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하면 양호실에 가도 된다는 입실 허가증을 담임 샘이 떼 줄 것만 같은, 하지만 자칫 꽤병으로 찍히고 혼날 수도 있는 불안한 모험심의 기분(지금도 이렇게 길게 말하는 것을 보니 아마 안 아팠나 보다).


그날들이 어제 일 같기도 하고 아득하기도 한, 아침이다.




이런 아침을 정말 바랐다. 배고프지도 않고 그렇게 많이 피곤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활력이 넘치게 있지도 않은, 나른하고 여유롭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한, 이런 느낌의 아침을.



아무튼 나는 정말이지, 멈추고 싶었다. 아주 큰 쉼표를 찍고 싶었다. 모든 것을 멈추는 느낌 속에서 깊고 진지하게 생각하기를 바랐다. 의미있는 사유 속으로 들어가서 생의 지속 여부와 어떤 가치로 생을 살아야 하는지와 같은 중차대한 문제들을 사유할 수 있기를 바랐다. 깊이 심사숙고하고 삶과 죽음 사이의 어느 지점이 아니라 삶이든 죽음이든 하나의 분명한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기를 바랐다.




고등학교 때 한 삼십 분, 또는 한 시간, 아니면 반나절, 아니면 하루 동안, 수학 시간이 지나가고 영어1이, 독일어 회화가, 국어가, 전혀 흥미가 없는 물리와 지겨운 지구과학이, 그나마 뛸 수 있어 좋아했던 체육에 교련 같은 의미없는 과목들이 모두 지나가고 나서, 어느 보충수업- 알이 크고 이마가 넓은 수학 선생님의 수학 시간이었을까- 시간에 세 가지 꿈을 노트에다 쓰고, 그날부로 야간자율학습을 하지 않고, 집에 갔다가 바로 가출을 한 적이 있었다. 세월이 이토록 흘렀는데, 더 지혜롭고 신실하고 용기있어지기는커녕,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보다 더 우유부단하고 미련해진 걸까. 나는 왜인지 태풍의 눈과 같은 고요와 적막의 시간 속으로, 암막커튼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모든 빛을 가린 암흑의 시간 속으로 왜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걸까.


아무 소음도, 소란도 없는, 어떤 빛도 없는 고요와 암흑의 순간을, 그런 순간이 충분히 지속되는 시간을 절실히 원했는데. 그렇게 깊은 시간 속에서 충분히 쉬고 생각하고 싶었는데.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런 완벽한 어둠과 진공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지 못 했다. 하나님은 왜 아직도 내게 그런 어둠의 시간을, 완벽히 새까만 안식을 허락하지 않고 있는 것일까. 영원한 안식의 모형 속으로 들어간다면, 무엇인가 더 나은 사람의 상태가 되어 지금보다 더 나은 존재로서 더 나은 행동과 선택을 할 수 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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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것도, 들을 것도, 읽을 것도 너무나 많다. 다 지우고, 아무 미래도 그리지 않고, 아무 계획도 잡지 않았는데. 그래도 여전히 많은 알림과 약속, 연락, 해야 할 일들이 내 앞에 놓여 있다. 신기하다. 정말 아무 것도 없는 새까만 우주에서 지구로 가는 우주선을 놓쳐버린 우주인처럼 될 수는 없는 걸까. 역시 나는 땅에 발 붙이고 사는 지구인의 운명을 벗어날 수는 없는 걸까.



직접 만든 뇨끼 반죽. 마트에서 떨이로 한 봉지에 천 원 하는 조림용 감자로 만들었다.



뇨끼라는 음식을 처음 안 것은 박찬일 셰프가 이탈리아 요리를 설명하는 디브이디를 보게 되었을 때였다. 아주 오래 전 도서관에서 책을 7권 정도 빌렸다. 그 중에 박찬일 셰프의 책도 있었는데, 딸림 자료로 있던 DVD를 나는 굳이 사서에게 좀 찾아달라고 해서, 아득바득 빌렸었다.


그리고 굳이 그 디브이디를 그냥 보았다. 요리를 할 예정은 없없지만(할 의욕도 의미도, 그리고 거의 필요도 없었으니까) 나는 그냥, 멍하니 보고 있었다. 몇 가지의 파스타나 리조또, 그리고 뇨끼까지. 에센셜한 이탈리아 요리를 셰프가 직접 만들면서, 요리법에 대한 담백한 설명이나 셰프의 이탈리아 요리에 대한 철학 등이 자연스러운 인터뷰 형식으로 담겨있는 영상들이었다.


요리란 참 신비한 것이었다. 요리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가, 두근거리게 하고, 살아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생의 몇 안 되는 경험이었다. 요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듣고 있는 것일 뿐인데도 말이다.


리모컨을 조정해서 DVD 홈 메뉴 창에서, 각 이탈리아 요리 메뉴들을 하나씩 눌러보는 일이 즐거웠다. 하나씩 눌러서 셰프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 나를 설레게 했다. 꿈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도, 그것을 실현하지도 않았지만, 마치 어떤 꿈을 꿔보는 일처럼 즐거웠다. 설레고 달콤한 꿈을 시뮬레이션으로써 꿔보는 것 같았다. 토마토 파스타라는 꿈을 눌러보고, 버섯 리조또라는 꿈을 눌러보고, 크림 뇨끼라는 꿈을 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오래 살고 싶어 하지는 않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요리의 재료에서부터 건강한 철학을 추구하는 박찬일과 샘킴을 좋아한다. 살아있는 동안은 그렇게 살아있고 싶어하나 보다. 그들의 요리처럼, 스페셜티 커피처럼, 고등학교 때 양호실의 떨림처럼, 이탈리아처럼, 스페인처럼, 뇨끼의 감자 반죽처럼. 이 아침처럼.








* gnocchi [뇨끼] : 덩어리란 뜻의 이탈리아어 gnocco의 복수형이다. (gnòcco: 혹; 머리가 둔한 사람; 덩어리) 큰 덩어리를 작은 뇨끼 조각으로 조각내어, ‘뇨꼬’들이란 뜻의 복수형 단어 gnocchi가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필자는 생각했다. 한국의 수제비도 수제’보’가 수제보들이란 뜻의 수제’비’로 복수형이 된 단어인 것처럼. 방금은 농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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