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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화장실 휴지에 대한 원망

또는 그것에 대한 강박.

by jungsin



금요일 오전 9시경, 지하철은 러시 아워를 살짝 비껴간 듯 승객의 적당한 가득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 막 지하철로 환승해 끝 임산부석 앞에 서 있었다. 임산부석에는 삼십 대 초중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가 피곤한 듯 눈을 감고 뒤로 기대어 있었다. 여자는 면과 폴리에스테르 혼방 소재로 추측되는 편안한 비둘기색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나는 아침에 급히 나가서 읽을 (수도 있는) 책 세 권을 챙겨 왔다. 파리 좌안의 피아노 공방, 키에르케고르 입문, 활자 안에서 유영하기.


책들을 비닐봉지에 급히 담아 온다는 게, 하필 일반 쓰레기 비닐봉지에 담았다. 싱크대 가장 아래 서랍 윗 틈으로 삐져나온 연두색 일반 쓰레기 봉지를 꺼내어 역시, 남자답게, 터프하게 그냥 담아 나왔다.


굳이 책들을 봉지에 담아 나와야겠다고 생각한 연유는 그것들이 담길 큰 가방 안에는 아이스 케냐를 담은 텀블러도 동반자로 함께 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어제 스터디에서 돌아오던 밤. 역시(이번이 아흔 번째 정도 되던가), 텀블러가 가방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뚜껑이 돌아가 열리면서 또 한 차례 가방을 적시던 사태가 있었다. 백팩을 올려 두었던 임산부 좌석 위로 커피가 조금 흘러서 닦아야 했을 정도로 적지 않은 방류였다. 오늘은 그런 일이 있었던 밤의 바로 익일 아침이었다. 따라서 단도리를 철저히 해야 할 필요성과 절실성이 공존했다.


아직 캄캄한 새벽에 깨어 프렌치 프레스로 내린 커피와 마트 샌드위치를 즐기고, 상쾌한 샤워를 마치고, 태블릿과 읽을 책까지 챙긴. 아침의 리듬에 거의 빈틈이 없던 모닝 플로우였다. 그러니까 그러한 흐름은 새벽 5시 20분부터였다. 서두르지 않는 움직임을 유지하면서, 기분 좋은 박자를 깨트리지 않는데 나름대로 성공한 아침. 암흑과 빛 사이의, 엷게 밝은 회색 빛이라고 부를 수 있는 아침이었다.





나는 버스 맨 뒷좌석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앉으려는데 하얀색 무선 이어폰 케이스가 보였다. Samsung이라고 쓰여 있었다. 지체 없이 그것을 기사님께 이첩해 드리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당연한 선행을 추가하면서, 여전히 기분 좋음의 행진은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이대로 휴대폰이나 들여다보며 앉아있을 수 없다면서 연두색 쓰레기 봉지에서 ‘키에르케고르 입문’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기분 좋게 책을 열어 읽으려는 찰나, 맨질맨질한 책 표지가 번지르르한 무언가(가령 반찬통의 기름기라든지.)로 덮여 있는 것을 보았다. 어떤 서막이었다.


아니, 이게 뭐지. 가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나. 비닐에 담아 싸왔던 빵이 책 표지 위로 덮쳤나. 생각해 보니 아마 연두색 봉지에 내가 무언가 기름기가 묻을 만한 것을 담은 적이 있었나 보다.


약속한 시간까지 여유가 있지는 않았는데, 나는 지하철 개찰구를 들어가긴 전 서둘러 역 내 화장실에 들렀다. (지하철 도착 시간을 알리는 전자 안내판은 지하철이 2분 후에 도착함을 알리고 있었다.) 입구 바로 앞 장애인 화장실에 있던 두루마리 휴지를 한 번 드륵드륵 돌려서 뜯었다. 그리고 한 번 더 드륵드륵 뜯어서 세면대의 물을 틀고, 휴지에 물을 좀 묻혀서 나왔다.


승강장으로 곧장 달려갔지만 지하철은 아직. 화장실에서 책을 좀 다 닦고 나올 걸 그랬나. 생각하며 줄을 선 채로 책을 좀 닦아보고 있었다. 금세 지하철은 도착했다. 들어서서 왼쪽으로 돌아 아무런 생각 없이 비둘기색 트레이닝복 차림의 여자 앞에 서서, 이어서 책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서 1분 정도를 닦았을까. 작은 휴지 조각이 본체가 되는 휴지 뭉치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책 표면에서 문질러지며, 약간 물에 젖어있는 채 뭉쳐 있는 휴지 덩어리로부터 떨어져 나간 것이었다. 아 진짜. 지하철 공사는 왜 이렇게 얇고 부실한 화장실 휴지를 사용하는 거야. 승객 다수가 이용하는데 이렇게 쉽게 부서지는 휴지를 비치해 놓다니. 그때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 왠지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는 조금 더 앞쪽의 낙하 방향인 것만 같았다. 내심 미세하게 당황하며 휴지 조각을 찾아 시선을 옮겨보았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너를 잊겠다는 거짓말을 두고 돌아오긴 했지만’ 아.. 바로 앞에서 자고 있는 여자의 무릎 위에 떨어져 있었다. 역시. 나는 열역학 제2법칙을 거스를 수가 없는 걸까. 어차피 그토록 꼭 짜여 있던 ‘기분 좋은 아침 리듬’이란 것은 해체될 수밖에 없던 것이었을까. 나는 지금 질서에서 무질서로 파괴되어 가는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것일까. 어쩐지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이렇게 아무 문제가 없을 수가 없는데. 그랬다면 과연 내 인생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지.



순간적으로 수많은 생각이 여의도 세계불꽃축제의 폭죽들처럼 터져 올랐다. 나는 공적 공간의 도덕에 관한 한 퍽 민감하고 엄격한 편이었다. 정말이지 내 강박적 도덕의 민감도상 그것은 반드시 정정되어야만 하는 현실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윤리의 충돌이었다. 살아가면서 이런 케이스가 흔한 것은 아니지만(사실 고백하자면 유독 나에게만 흔하기는 하다.), 간혹 이런 아이러니한 충돌이 일어날 때가 있다. 가령 예배에 늦었는데 교회 바로 앞에 있는 4차선 도로의 횡단보도 신호등은 빨간 불이다. 지나다니는 차는 거의 없다. 그럴 때 한 선교사님의 말씀처럼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보는 사람이 있든지 없든지 신호를 지켜야 하는가. 아니면 구역장님이 내가 안 온다고 걱정하며 카톡을 보내기 전에 눈을 질끈 감고 가로질러 달려가야 하는가.



이럴 때 나는 고장 난 로봇이 되곤 했다. 건너야 하나 말아야 하나. 비둘기색 트레이닝복 여자의 무릎 위에 떨어진 휴지를 집어서 다시 내 가방에 넣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나는 정말 휴지를 여자의 무릎 위에서 집어 들고 싶었다. 핀셋 같은 것이라도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핀셋이 가방 안에 있는 것이 더 이상하지만, 아무튼 구조 과정에서의 미세한 신체적 접촉은 어쩌면 불가피할 지도 모른다. 더욱이 나의 호흡의 상태도 중대한 하나의 문제였다. 버스 정거장에서 시작해 지하철 플랫폼까지 서둘러 달려오느라 나의 호흡은 다소 거칠어져 있었다. 안정적이지 않은 호흡은 자칫 손 끝의 움직임에 영향을 줄 수도 있을 것이었다.



더욱이 하필이면 이즈음의 나는 부지런히도 손톱을 잘라 손톱을 정말 깨끗하고 짧게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내게 이 사건은 이제 손톱 아래 튀어나와 있는 손가락 맨 살만으로 수행해야 하는 임무가 되었다. 손가락 끝의 움직임을 정교하게 가져가야 하는 이런 섬세한 작업 앞에 당도했다고 생각하자 나는 더욱더 긴장이 되어, 긴장한 손바닥 안과 이마에서 식은땀까지 나는 것만 같았다.



그러한 한편, 왜인지 나와 같이 탔던 바로 오른편에 있는 출입문 오른쪽에 기대 서 있는 여자분이 아까부터 자꾸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오십 대 초 정도였는데 휴지 불시착 사건 이전부터 나를 흘깃흘깃 보는 것 같았다. 그러면 그러라지 내 인생은 그런 것을 신경 쓸 만큼 그렇게까지 여유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이 사건 안에서 그녀는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내가 휴지 조각을 앞에 있는 여자의 무릎 위에 떨어트린 것도 보았을까. 각도상 안 보일 것 같기는 한데. 저 여자는 내가 장차 어떻게 할 것인지를 계속 관찰하고 있는 걸까. 이제 그분의 시선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시선을 뗄 수 없는 이상형을 발견하기라도 한 듯, 나의 시선은 자꾸만 휴지 조각을 향했다. 약간 적은 휴지 조각이 트레이닝 복 위에 절묘하게 붙어 있었다. 어떡하며 좋지.. 저걸. 아무래도 자연스럽게 떨어질 수 있는 중량감과 접착 정도는 이닐 것 같았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는 급기야 티가 나지 않도록 선 채로 무모하게 후- 불어보기도 했다. 나의 입 바람은 내 입 바로 앞에서 공허하게 흩어질 뿐이었다.


사실 앞의 여자분은 적당한 깊이 정도의 숙면 중이신 것 같았다. 그녀가 입은 비둘기색 추리닝 바지는 F/W 시즌용인 것 같았다. 그러니까 기모까지는 아니어도 나름대로는 두터운 질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내 손끝이 살짝 이방 여인의 무릎을 스치더라도 휴지 피해자 당사자인 여자분에게 피해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나의 윤리적 기준은 이제 주변 사람들로 옮겨가, 주변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고뇌하며 정차 역이 거듭될 때마다 승객의 밀도는 높아졌다. 어느덧 왼쪽을 돌아보자 앞머리에 헤어롤을 말고 있는 키가 작고 어린 여자가 바로 내 왼쪽 어깨 뒤에 바싹 붙어 서서 스마트폰을 손가락 끝으로 톡톡거리고 있다. 오른쪽을 돌아보자 약간 포멀한 기지 소재의 출근복 차림을 한 서른 전후의 여자가 역시 내 오른쪽 어깨 바로 뒤에서 스마트폰을 바라보고 있다.





외로웠다. 철저한 혼자였다.



일시적이었지만 두려움마저 들었다(나는 여자를 무서워하지는 않지만 다소 두려워한다.). 공간은 삼면이 여자로 둘러싸인 반도이고, 시간은 일제 강점기인 것처럼. 어딘지 모르게 오싹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외로웠다. 철저한 혼자였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누구보다 나 자신이 침착해야 했다. 일단 책을 마저 다 닦아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려야 할 성신여대입구역과 전 역 사이 구간에서 극적인 휴지 인질의 구조 작전을 펼쳐 보자. 그리고 지하철이 정차하면 유유히 내리는 것이다.


이런 내 사정을 알 리 없는 주변의 여자 승객들은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 상상해 보았다. 갑자기 웬 남자가 내리기 전, 앞에 앉아 있는 여자의 무릎 위로 골똘히 시선을 가져가며 허리를 굽혀 손끝으로 무언가를 집더니 가방 안에 넣는다. 그리고는 얼굴이 벌게지더니 헛기침을 한두 번 하고 지하철에서 내려 황급히 사라진다. 아.. 아무래도 이상하다. 아무리 윤리적 강박에 지배받고 있는 나일지라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그림이었다.



하지만 그런 무모한 용기(?)는 좋은 기분과 상쾌한 집중력을 요하는 아르바이트 현장에 나가는 나의 감정 상태에 어떤 개운함을 제공해 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한 어떤.. 내면의 투명도(?)와 자아 일치성의 높은 해상도(?)를 위해 주변의 여자 승객들이 이상하게 바라볼 가능성은 어느 정도 감수해야 했다. 어쨌든 이 치열하고 외로운 도덕과 내적 해방의 딜레마 속에서 그보다 더 나은 해결책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그때 좋은 질문을 해야 했다. 보통 나는 무엇이 옳은가-를 묻고, 그냥 눈을 질끈 감고 실행으로 옮겨 해결할 만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선례를 살펴보자면 취객 아저씨로부터 위협을 당하던 모녀를 구출하고 아저씨가 다시 다가오지 못하도록 한 사건의 경우(어떻게 된 일인지 도무지 사람들이 나서지 않았다. 끌어안음으로써 제압한 아저씨는 내가 다 뭉클할 정도로 힘도 없었는데 말이다)와 같은 상황이라면 내가 나서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런 일들이 몇 번 있은 후로, 나는 행동해 버리면 그만이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것보다 하는 것이 모든 것을 청명하고 공명정대하게 만든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배워 알고 있던 터였다. 상대가 너무 위협적이더라도 나서서 봉변을 차라리 당하는 편이 나았다. 이후 찾아올 괴로움과 모멸감의 형벌과 비교하면 훨씬 더 가벼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토록 치열한 딜레마는 미처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이제 거사를 치뤄야만 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목적한 역에 가까워져 갈수록, 나는 생각이 더욱더 깊어졌다. 나는 왜 이렇게 홀가분하지 못할까. 나는 왜 이렇게 홀가분하지 못할까. 문득 내가 조금 불쌍했다. 자기 연민으로 미세하게 뭉클해지기까지 했다. 나는 왜 이렇게 삶이 무겁고 힘들지. 눈시울이 조금 불거졌다.


지신을 조금 헐겁게 해 주면 안 되겠니, 아무개야. 여자분이 일어나면 무릎에 붙어있는 약간 젖은 휴지 조각 따위 바닥에 떨어질 수 있는 것일 테고. 또 그것은 언젠가 청소부 아주머니의 빗자락에 의해 쓸려 담길 테지. 나는 종전까지 따랐던 경직된 윤리적 관념에서 이미 자신이 조금씩 이탈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었다. 순수함이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약간은 서럽기도 하고 그런 자신이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그보다 그것은 선선한 바람처럼 불어오고 있었다. 이것은 어쩌면 건강한 방향으로의 반윤리였다.


열차가 곧 성신여대입구역에 도착했고, 그리고 나는 그냥 내렸다. 아니, 아직 그냥은 아니었다. 못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힘겹게 옮겨야 하기는 했지만, 아무튼 그냥 내렸다.




헤어롤 여자도, 정장 기지 여자도, 쉬흔의 여자도, 비둘기색 추리닝 여자도 동시간의 한 공간에서 누군가의 내면 안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몰랐을 것이다. 표상과 실존 사이의 거리는 이처럼 멀다. 친절함과 사랑이 먼 것처럼. 망각을 유도하는 정돈된 이성과 ‘미친 사람처럼 그르렁거리며 거리를 배회해야만 하는’ 그리움이 먼 것처럼. 그러니까 그것도, 다 그리움의 엔트로피였다.


계절은 또다시 그리움의 계절, 가을이다. 매 해 가을은 하나의 새로운 계절이지만 나의 시간은 늘 같은 그리움을 가진 가을이다. 영원히 같은 그리움을 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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