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머무는 이 작은 동네에 어둠이 내려앉으면 나는 거의 어김없이 깊은 어둠에 빠지곤 한다. 해가 저물어가는 것이 느껴지면 왜인지 울렁울렁거린다. 영혼의 심미적 멀미 같은 걸까. 정신은 또릿또릿하지만 이상하게도 감정은 정신과 따로 논다. 그것은 자꾸 아득하게 어지러워진다.
사실 이런 기분을 느낀 것은 아주 아주 오래되었다. 이미 다섯 살 때부터 골목길의 끝에서부터 어둠이 낮게 깔려오면 나는 별안간 우울해져 엉엉 울고 싶어지곤 했다.
내게 있어서 그것은 계절을 탄다. 봄 여름의 낮과 밤이 포개어지는 황혼과, 겨울의 땅거미는, 각각의 느낌이 전혀 다르다. 스프링 써머 시즌의 매직 아워는 신비로울 정도로 아름답게 느껴지곤 하지 않나. 봄 여름 녘의 석양빛에 대한 그러한 감상은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내가 유난히 벅차 하기도 하지만. 내게만 특별한 무늬를 만들어내는 벅참이라고 하기에 나의 그것은 하얗게 하얗게, 마냥 아득히 밝다.
개성은 어둠 속에서 꽃피는 것이라고 여기는 나에게는 그것의 끝이 좀 몽툭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나만의 무늬라고 하기에, 나의 밝음은 너무, 너무, 해맑기만 하다. 부풀어져 있거나 다소 뭉개져 있는 밝음 같은 것이다. 브라운 슈거를 넣어 달콤해진 라떼 위에 또다시 느끼할 정도로 듬뿍 얹어진 생크림처럼 말이다.
하지만 폴 윈터 시즌의 땅거미는 나만의 무늬를 만들어 낸다. 그것은 울렁거림이다. 나는, 문득 죽어 사라져 버리고 싶을 만큼 울렁거린다. 특히 이렇게 쌀쌀해지기 시작하는 즈음부터 겨울의 2/3 정도까지의 계절이 그렇다. 정말 땅거미와 내 영혼이 하나로 포개어질 때는 너무 울렁거리고 모든 희망이 다 사라지는 느낌마저 들어,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다.
만일 그것이 생명이라면, 비록 어둠일지라도 그런데 그것은 하나의 중요한 ‘개성’이다. 소위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는 주제에 나는 관심이 많다. 낮에는 누구나 명랑하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시시덕거리며 희희낙락 하하 호호 웃어서, 누가 누구인지가 구별하기 어렵다. 하지만 어둠이 가라앉으며, 어딘지 두려운 습기가 몸에 감싸이고, 볼에 스치는 온도가 쌀쌀해지면 숨겨져 있던 색깔이 드러난다.
가을-겨울 구간의 어둠은 사람들의 영혼을 긁어놓곤 한다. 크레파스 그림의 스크래치 기법 같은 것이다. 스케치북에 형형색색의 크레파스 칠을 하고, 그 위에 또다시 검은 크레파스로 뒤덮어 까맣게 색칠을 하고는, 마침내 설레는 마음으로 이쑤시개로 긁어낸 그림처럼. 스크래치 그림에서 대망의 주인공이 이쑤시개인 것처럼. 가을 겨울의 절정은 어둠이다. 그 어둠 위로 긁히는 내가, 집중해 보아야 할 나다.
어둠의 거인을 만나, 어두컴컴했던 방 안의 형광등이 갑자기 켜져 놀란 바퀴벌레처럼 혼비백산하지 않고. 엉엉 울고 싶을 만큼 외로워도, 비명을 지르고 싶을 만큼 두려워도. 피하지 않고, 그때 울렁거리는 나를 응시하는 것이다. 그 순간의 내 영혼을 살살 긁어보는 것이다.
아침이 되면 누구나 같은 햇볕을 맞으며 골목길로 걸어 나간다. 하지만 밤이 되면 서로 다른 무늬를 가진 나만의 이불보를 그리워하며 돌아온다. 우리는 저마다의 이불 무늬 속으로 파고들어 가기를 사랑한다. 형형색색, 알록달록. 두꺼운 이불속으로. 그 속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는 검은색 크레파스 색칠 속으로. 까만 색칠 속으로. 이토록, 새까만 색칠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