틱물같은 괴톡, 짧은 쇼물 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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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많은 지하철을 타면 사람 간의 간격이 좁아지고, 그러면 사람들이 보고 있는 스마트폰의 화면이 자연스레 보이곤 한다. 요즘은 놀라울 만큼 획일적인 취향의 패턴을 보이는 것 같다. 대개가 짧은 영상 콘텐츠나 예능 다시보기 같은 것을 본다. 그런 모습을 보며 솔직히 속으로 하곤 했던 생각은 ‘나는 남들과 달라.’였다. 저게 그렇게 재밌나 싶었고, 나아가 한심하다고까지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어느새 나도 그러한 것들의 영향을 받았는지, 이상하게도 영화나 책을 보는 집중력이 약해진 것을 느낀다. 물밀 듯 밀고 들어오는 영상 컨텐츠들이 드디어 최후방에 있던 나까지 잠식한 것일까. 곰곰이 원인을 생각해 보자면 OTT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언제라도 이것저것 자유롭게 열어 볼 수 있는 무제한의 감각이 생긴 것이다. OTT를 유료 구독하는 기간 동안 어떤 영화든 열어볼 수 있고, 금세 다시 닫을 수 있다. 열람에 대한 기회비용은 0원이다. 영원한 0원의 감각. 마치 내가 영원한 존재인 것만 같은 착각마저 불러 일으키는 0원의 감각. 기회 비용 0원의 감각. 한 편의 영화를 단호히 선택하는 분명한 결정도, 집중의 헌신도 불필요한 0원의 기회 비용의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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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무제한의 감각’은 OTT가 처음이 아니었다. 내게는 이미 고기 뷔페의 감각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에 대한 실망의 감각이라고 해야겠다. 그토록 먹고 싶었던 삼겹살. 목살. 껍데기. 그것들이 뷔페 바에 무제한으로 놓여 있는 천국buffet bar paradise.
하지만 나는 다 알고 있다. 몇 번 왔다갔다 하며, 차가운 스테인레스 쟁반에 질리도록 얹어져 있는 고기를 두어 번 구워먹고 나면 금세 맛이 없게 느껴지고, 이상하리만치 내가 바라던 순간보다 질림의 순간이 너무 빨리 와서 어느새 싸구려 콘 아이스크림으로라도 느끼한 속을 달래며 마무리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고 만다는 것을.
이내 의아해 한다. 맛있는 것 + 맛있는 것, + 맛있는 것… 무제한의 맛있는 것은 반드시 천국이어야 하는데. 나의 혀의 감각이나 위의 탄력성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그토록 믿었던 나의 포식자로서의 부캐에게 배신을 당한 듯, 망연자실해 하기도 한다.
그런데 뷔페의 역설과도 닮아 있는 ‘무제한’의 허무감의 실체를 깊이 들여다 보려 하면, 왠지 그리 낯설지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역시 해 아래 새것은 없는 것인가. 어쩌면 그것은 오래된 철학적 주제다. 가령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 논쟁을 일으켰던 유명론과 실재론 사이의 대립 구도와 포개어지는 부분이 있다.
유명론은 개체의 존재와 그것으로서의 경험을 중요시하는 철학 사상이다. 개별자가 있기에 보편적 개념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실재론은 그것과 정확히 반대되는 사상으로, 보편적 개념이 개체의 개념보다 우선하는 것이라는 믿는다.
나는 수백 권의 전자책이 들어있는 전자책 앱을 가졌고, 그것들을 언젠가는 읽을 것이므로 머지 않아 지성인다운 면모를 갖추게 될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미 지성인이 된 듯한 기분을 느낀다. 또는 스마트폰과 넷플릭스와 유튜브와 Shorts, 틱톡을 모두 가졌으므로, 이 세계의 모든 즐거움도 곧 내것이 될 것이라고(그것들이 나를 행해 활짝 열려 있으므로 머지 않아 다 내것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이러한 믿음은 손으로 만져지지 않는 가상의(물론 실재하지만 적어도 물리적으로 실재하지는 않는다는 뜻에서의 가상. 또한 아직 읽지 않았고, 시청하지 않았지만 잠재적으로 그러할 것이라고 여기거나 심지어 자신이 이미 읽고 시청했다고 착각하는, 무한의 보편감각이라는 점에서 가상.) 보편 세계를 추종한다는 점에서, 또한 한 편 한 편의 이야기보다 거대한 컨텐츠의 집합체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실재론에 뿌리 내리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명론에 의하면, 아무의, 무엇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오로지 낱개의 한 권 책에만 빠져 집중해서 읽는 경험을 내가 하지 않는다면 전자책 앱이란 나에게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것들 안에 담겨 있는 지식은 내가 한 권 한 권 섭취하지 않는 한 나의 지성으로써 발현될 수 있을 리 없다. 넷플릭스와 유튜브와 틱톡과 Shorts로 보는 잠깐 씩 보는 영화 요약 영상은 참을 수 없이 조악하다. A.I. 목소리로 영화를 요약해주는 영상들을 보는 일은 집중해서 영화 한 편을 감상하는 경험을 대표할 수도 대신해 줄 수도 없다. OTT 월 구독료 만 원을 내고 영화 한 편도 제대로 보지 않느니, 내가 정말 보고 싶은 DVD 한 장을 사서 끝까지 보고, 계속 그것을 몇 번이고 돌려보며 완전히 소화시키고 리뷰까지 쓰고 말겠다. 그게 영상 컨텐츠를 제대로 즐기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렇게 믿는 것이 유명론적 관점이다.
괴테도 유명론의 관점과 비슷한 말을 했다. ‘독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독일인 하나하나가 모든 것이다.’
원문이나 그것의 해석과 관련해서는 이하 네이버 지식인의 답변을 참고할 수 있다.
“Deutschland ist nichts, aber jeder einzelne Deutsche ist viel, und doch bilden sich letztere gerade das Umgekehrte ein. ... 독일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독일인 하나하나는 많다 (가능성이 많은 존재들이다). 그런데도 이 독일인들은 딱 거꾸로 생각하고 있다. - 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 - 1832) 출처: Friedrich von Müller 재상(1779-1848) 과의 담화 때 나온 말임. (1808.12.14) https://www.aphorismen.de/zitat/91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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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한의 제약’의 역설이란, 인간을 둘러싼 수많은 유한성의 성질과도 맞닿아 있는 것이다. 당장 인간이 이땅에서 유한한 존재로서 살아갈 숙명을 가졌다는 것과 무한한 OTT의 감각은 어떤 식으로든 대립되는 감각을 자아낸다.
‘모든것에 의한 아무것도 아님’의 감각은, 선택의 결단과 자신의 선택에 대해 모종의 책임을 지는 헌신적인 집중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분주하게 왔다갔다할 뿐, 헌신적인 집중 끝에 마침내 끝까지 완청하는 깊이의 시간을 만끽할 수도 없게 되고 만다. 나아가 이야기의 희소성을 느끼며, 이야기 속의 독특성의 요소들을 흡수하는 일을 방해하고, 그것들을 집중해서 바라보는 일을 통해 나올 수 있는 개인의 개성마저 괴멸시킨다. 마침내 우리의 집중력과 상상력을 약화시키거나, 적어도 이야기의 순전한 원형의 모습을 순수한 형태로 추구하던 선배 세대의 문학적, 인문학적 감수성의 형질을 부정적으로, 심각하게는 기형적으로 변형시킬 위험마저 도사리고 있지 않다고 확언할 수 없다.
OTT떼와 유튜브떼, 틱톡과 Shorts 떼. 그것들은 메뚜기떼처럼 조용히 다가온다. 저 멀리서 보이는 것은 다만 메뚜기 몇 마리 같아 보였다. 하지만 그것의 한복판 안에 들어가면 징그럽고 괴이한 날개짓의 굉음 속에서 수십 만 마리의 메뚜기들이 농부가 일일이 땀흘려 작농한 논밭을 갉아먹고 있는 끔찍한 장관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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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것을 가진 것의 느낌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느낌과 유사하다.
보기만 해도 흡족한 포만감이 느껴지곤 한다. 정말 많은 콘텐츠들이 꽉 찬 화면 속에서 손짓하는 OTT 플랫폼을 보고 있노라면. 썸네일이나 짧게 재생되는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기만 해도 마치 영상의 스타일이나 이야기의 흐름을 어느 정도는 다 본 것만 같은 착각이 인다.
쉬면서, 또는 밥을 먹으면서 볼 만한 것이 없는지 이것저것 하나씩 괜시리 눌러보곤 하는데, 마땅히 볼 만한 것이 없다고 느끼면 그냥 높은 인기 순위에 있는 컨텐츠를 눌러서 입을 헤 벌리고 보곤 한다. 그러나 그러다가 말고, 또 그러다 만다. 그렇게 같은 패턴을 반복하다 보면 결국, 한 달이 가도록 제대로 된 영화 한 편을 처음부터 끝까지 본 것은 몇 편이 채 되지 않는다.
열어본 콘텐츠는 다수이지만, 한 편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경우는 적은 것이다. 그야말로 모든것을 가진 듯 하나,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것이다. 남는 것은 Shorts 영상을 볼 때와 같은 공허한 허무감 뿐이다.
프리미어 리그 작년 시즌 중계 중이었던가. 스포티비 아나운서가 ‘우리는 손흥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라고 외쳤다. 그렇다. 지구 반대편에서 시원하게 골을 넣으며 활약하고 있는 손흥민의 시대에 살고 있어, 나는 SPOTV의 선명한 화질만큼 선명한 행복감을 느낀다. 하지만 틱톡과 쇼츠, 유튜브, OTT의 지배를 받아 긴 호흡으로 집중하는 행복감을 잠식당하고 있는 불행한 세대인 것도 SPOTV의 선명한 화질처럼 선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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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다음은 요리를 전공했다는 지인과 메신저를 하던 중 필자가 한탄하듯 했던 말이다.
“아메리칸 셰프 보다 말았었는데. 마저 보고 싶긴 해요.”
“카모메 식당도.. 열어보긴 했었을 거 같은데..ㅎ
비디오 테이프 시대에는 천원인가? 이천원? 주고 하나 빌려서 보면.. 재미있든 재미없든, 재미가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믿는(?) 거룩한 마음(?)으로.. 끝까지 보려고 집중했었는데.. 요즘은 좀 영화 한 편을 끝까지 보게 되는 경우가 드물어지는 것 같아요.. 비디오 플레어어가 따끈따끈해지도록 영화를 보고, 책을 성스럽게 대하며 읽던.. 그런 날들의 흡수력을 되찾고 싶네요. ㅎ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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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처: 네이버 지식인.
https://m.kin.naver.com/mobile/qna/detail.naver?d1id=11&dirId=110807&docId=222503806&qb=66qo65OgIOqyg+ydgCDslYTrrLQg6rKD64+EIOyVhOuLiOuLpA==&enc=utf8§ion=kin.ext&rank=2&search_sort=0&spq=0
2) 카톡 캡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