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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트넘의 새 감독에 대해서

그리운드의 철학자

by jungsin




저는 그렇게 자랐습니다.



그의 축구가 음악처럼 들렸던 이유를 알겠다.


​그의 음악이, 아니 축구가, 바흐 같기도 하고 쇼스타코비치 같기도 하다고 느꼈는데. 인터뷰를 보며 왜 그렇게 느껴졌는지 알게 되었다.




​토트넘 훗스퍼에 새 감독이 부임하고 이제 고작 열 경기 가까이 했을까. 하지만 그의 축구는 어딘지, 이미 확연히 달랐다. 무리뉴의 그것이나 콘테의 그것과는 말이다.


필자가 느끼기에 눈에 띄게 달라진 점 하나를 들자면 유명과 무명, 메인과 마이너의 이분법을 깨끗이 지워버린 것이다. 이전의 두 감독이 추구하는 전술에는 주요 역할과 보조 역할의 이분법이 너무 뚜렷했는데, 그것은 즐거움과 지루함이 공존하는 축구였다.


이전의 두 감독들은 열한 명을 두 명으로 압축시킨 듯한 축구를 선보였다. 한국의 축구팬들은 ‘손케 다이나믹 듀오’를 만끽하는 일이 즐거웠다. 유명하다는 외국인 감독이 쏘니와, 쏘니 다음으로 멋있는 케인을 집중적으로 만끽할 수 있게 해 준 일에 대해, 내심 모종의 감사까지 느꼈다.


새로 부임한 감독의 축구는 운동장에서 느껴지는 플레이의 질감이랄까, 현장의 텍스처가 완전히 달랐다. 고작 서른 하나의 손흥민이 주장이고 형이랍시고 뒤에서 경기를 돕는 듯한 외연에 대해 어색한 박수를 보내면서도, 내심 못마땅했다. 쏘니는 언제나 주인공이어야 하는데. 토트넘 골대 앞 페널티 박스 모서리에서부터 부스터를 장착해, 십 초 정도 공을 몰고 달려가 골을 넣는 걸 봐야 속이 시원해 질 것 같은데. 칼칼하지 않고 못내 찝찝했지만, 어쨌든 희안하게 이기기는 하니까. 이기는 거는 잘 하는 거니까. 좋아 보였다.


​그런 축구를 바라보는 동안 나는 감독이 잘 보이지 않았다. 선수들을 돋보이게 하는 감독이라고 생각했다. 이전의 두 감독은 감독이 드러나고 선수들은 감춰졌다(케인과 손은 제외하고). ​새 감독의 그런 결을, 단순한 시선으로써 바라보며 그가 뉴잉newing 쉐도우shadow 코칭 스타일의 감독이 아닐까 짐작했다. 하지만 인터뷰를 접해 보니 오히려 굉장히 마스쿨린masculine하고 보수적인 사람이었던 듯 보였다.




그리고 오늘의 인터뷰를 보면서, 비로소 그가 지휘자처럼 보였다. 한낱 체육 선생이나 스포츠 코치가 아닌듯 보였다. 그는. 또 비로소, 축구가 철학의 대결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라는 철학, 아스널이라는 철학, 맨시티라는 철학과 토트넘 훗스퍼라는 철학. 철학과 철학과의 대결. 철학이 있는 감독과 철학이 없는 감독의 대결. 진정한 철학을 가진 감독과 겉으로만 번지르르한 철학을 가진 감독의 대결.


​이게 정말 재밌는 것이었다. 점점 재밌어졌다. 새 감독의 축구는 인문학을 보는 것 같았다. 그는 트렌디하고 뉴잉한 감독이 아니었다. 팀의 창의성을 극대화시키고 있는 그는 뜻밖에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결을 가지고 있었다. 전통 수호자는 보이지 않는 가치와 정신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가 꼭 그랬다. 그는 축구를 통해 어떤 쉽ship(duties of something/the state of being something)을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근원적인 스포츠맨 쉽이라든지, 희생, 또는 힘이라든지, 나아가 인생에 대한 태도라든지, 그런 정신적인 것들까지 말이다.


그는 적어도 자본주의에 물들어 비열하게 승리하는 유명 감독들과 결을 달리하기 원하는 듯 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중요시하는, 그러한 성질은 인터뷰 중 VAR 시스템이나 심판의 판정에 대한 짤막한 말에서도 잘 드러났다. ‘VAR이 개입되어 경기 내내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로메로와 우도기 퇴장에 불만은 없으신지요?’ 기자가 물었을 때는 불쑥, 자신 안에 전통의 수호자를 꺼내 보였다. ‘우리는 심판의 판정을 받아들여야 하죠. 저는 그렇게 자랐습니다.’ ‘Just we are(그게 우리에요). 책임이 저에게 있는 한 우리는 계속 이렇게 플레이할 것입니다.’라고도 했다. ‘열 명, 아홉 명으로 경기를 하게 되면 보통 라인을 내리고 수비 블록을 세우지만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고 라인을 높게 유지했는데요.’라고 묻는 기자에게 말이다.


‘또 다른 아주 중요한 경기에서 오늘처럼 열 명이나 아홉 명의 선수들이 뛰게 되는 경우가 온다면, 감독님의 방향성도 바뀌거나, 타협될 가능성이 있을까요?’ 기자가 말하는 중간에 그는 이미 고개를 가로 젓고 있었다. ‘5명이 되어도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never crack”).’라고 말하고는 눈을 길게 감으며 엷게 웃었다. 기자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철학자처럼 말했다. 짧은 인터뷰 내내 쇳소리 섞인 쉰 목소리로 나지막이 읊조렸다. 언어의 선택과 깊이, 문장의 리듬 같은 것에서 문과적 소양이 느껴졌다. 콘테나 무리뉴가 어떤 독서를 했는지 필자는 전혀 알지 못한다. 새 감독에게는 선수 출신 감독 특유의 격양된 톤이나 리듬, 얼버무리는 말하기 습관이 보이지 않았다.


콘테의 소양과 무리뉴의 소양과 새 감독의 소양은 달랐다. 다, 제각각 다른 것이 아니라 앞의 두 감독을 묶고 나머지 하나의 감독만 달랐다. 감독 이전에 사람인 그들에게 어떤 소양이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축구와 분리할 수 없는 것인 것처럼 보였다. never crack, just we are 같은 표현이 얼마나 문학적으로 좋은 문장인지를 떠나, 적어도 그는 축구에 관한 한 철학자처럼 보였다.


앞으로는 남은 경기를 모조리 지더라도 마음 편히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이전에는 대부분의 경기를 이기더라도 어딘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면 말이다. 마침내 결과로부터 자유로워져 만끽할 수 있는 축구가 생겼다. 안녕, 콘테뉴. 안녕, 포스테코글루.





포스테코글루 감독



최근 토트넘과 첼시의 경기. 이 날 심판은 토트넘 선수 두 명을 퇴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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