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제 라면을 먹으며
세상이 따듯하다는 감각이 필요했다. 그래서 옛 여자친구를 친구 추가해 보았다. 나는 번호를 외우고 있었고, 한번 입력하고 추가하니 바로 나왔다. 이렇게 가까웠는데. 바로 등록이 되고 또다시 이렇게 얼굴을 볼 수 있는 세상이었는데.
바로 이런 살아있는 감각이 필요했다. 내가 아는 사람들이, 나를 아는 사람들이, 우리 모두가 다, 다 같이 살아있는 감각이. 내가 살아 있는 감각이.
이게 뭘까.
잠깐 친구 추가를 했다가 사진을 몇 장 넘겨 보고 다시 친구 차단하고 닫았는데. 빨간색의 안구 수술용 레이저가 망막의 표면 위를 긁고 지나간 거 같았다. 그 짧은 순간에 하나의 막이 벗겨지는 것 같았다. 7년 가까이 흘렀더랬다. 그럴 수 없어서, 또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어서 눈길조차 주지 않으러 애썼던 것이.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잠깐 보고 닫았는데. 그 새 이미, 라면에 넣을 재료를 찾아보려 냉장고의 문을 여는 나의 시야가 달라져 있었다. 냉장고 안이 환했다. 영혼의 백내장 수술을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게 뭘까.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왜 이렇게 내가, 기분이 갑자기 좋아졌을까.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은 돌덩이처럼 그대로인데.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데. 그러니까 내가, 별안간 개안을 한 듯했다. 눈의 망막이 한 꺼풀 걷힌 것과 같은 느낌. 생생한 생의 감각을 가리고 있던 하나의 막이 일순간 걷힌 느낌이었다. 울고 싶었다.
나는 죽어 있었다. 이렇게 바로 등록이 되고, 살아있는 세상에서. 마땅히 다 살아 있고 살아 있어야 하는 세상에서.
살아있다면 이러한 감각이 정상적인 감각이었을 것이다. 나는 아마… 어쩌면 살아있음에 대해, 순수함에 대해, 꿈에 대해, 아무도 모르는 어느 날 밤에 자결을 했나 보다. 스스로 목을 졸랐나 보다.
새벽 세 시. 허기진 배를 모른 체하며 불을 끄고 누웠다. 정말 귀찮고 피곤했는데. 그러나 아직 뱃속은 청춘이 아우성치고 있었는지.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이내 곧 일어나 주방으로 달려들어 일단 싱크대 앞에 섰다. 커다란 팬을 집어 들어 인덕션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는 팬 안에 남아있던 로제 소스 찌꺼기 위에 그냥 끓인 물을 퍼부어 버렸다. 저지르면 일이 되게 되어있다는 믿음에 기반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갈 심산이었다.
대파를 식가위로 큼직하게 잘라 넣고, 살코기 베이컨을 몇 조각 넣고 밀떡을 두 움큼 정도 넣었다. 그리고는 라면 수프를 부어 다짜고짜 끓였다. 간도 맞추고 감칠맛을 내고 싶은 마음에 간장으로 작은 원을 한 바퀴 그려 넣고, 삭은 김치 조각들과 김치 국물도 부었다. 라면을 넣고, 소량의 모차렐라 치즈를 솔솔 뿌려 넣고 결명자 차 물을 좀 더 부었다. 끝으로 일찍 생각하지 못했던 양배추를 뒤늦게 식가위로 잘라 넣었다.
방 불을 켜고, 이불을 걷고, 노란 문 - 세기말의 시네필 다이어리를 틀어놓았다. 라면을 먹으면서도 나름대로 집중해서 보고, 라면을 다 먹고는, 콜럼비아 원두를 갈아 핸드 드립까지 내려서 마시며 계속 보았다. 끝나고 다시 처음으로 가서 또 틀어놓았다. 보고 또 보았다. 애써 생각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냥 멍하니, 멍하니 보았다.
그리고 지금은 누워서 바흐에 이어서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 마지막 방송 녹음분을 들으며 이렇게 쓰고 있다. 한 여자가, 안녕하세요 별밤 지기님. 인사만 했는데, 디제이와 청취자가 서로 말문이 막히며 울음이 터져버렸다. 디제이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청취자가 옛날 서울 말씨로 말을 이어간다. ‘저는 몇 년째 하루도 안 빠지고 별밤을 들은 청취자인데요. 별밤지기님 마지막 방송이라고 해서 너무 아쉽고요..’ 뭐라고 하는 말들이 그림 위에 떨어진 눈물방울처럼 뭉개져 버린다. 디제이의 마음처럼 나도 이미 먹먹함이 번져 여자가 뭐라고 하는지는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디제이는 한동안 대답을 하지 못하다가 간신히 입을 열어 말한다. 노래 틀을게요. ‘남들도 모르게 서성이다 울었지..’
나는 무엇을, 무엇을 그리워하고, 꿈꾸는 걸까. 아직도 생생히 내 코에 붙어있는 호흡에, 쌔근거리며 나오는 숨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여 본다. 모든 세계가 물에 번져 망쳐버린 수채화 같은데,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데. 살아있다. 하나의 감각이 희미해졌다가, 또 이토록 확실해졌다가. 생생한 삶과, 마취한 듯 몽롱한 상태의 삶. 두 세계를 왕래하며 의미를 더듬어 보는 사이 시간은 어떤 끝을 향해 내달린다.
해야 하는 생각은 전혀 하게 되지 않고, 겨우 감각으로써만 느껴본다. 숨을 쉬고 있다는 것. 살아있다는 것. 내 눈을 아무것도 가리는 것이 없이 생생하다는 것.
https://youtu.be/C0vPkyiqiKU?si=t_TATTyX1g7xSc2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