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작가님과 독자님들께
안녕하세요. 독자님들.
아마 처음 인사를 드리는 것 같아요.
이렇게 직접은요.
오늘 밤은 왠지 이렇게, 익명의 독자님들께-라는 형식으로 글을 쓰게 되네요.
저는 지금 방의 불을 끄고, 식빵 반죽을 오븐에 넣어 발효시켜두고, 누워서, 라디오를 들으며 휴대폰으로 글을 쓰고 있어요.
갑작스럽지만 고백하자면.. 요즘은 글을 쓰기가 통 힘들었어요. 통.. 이라고 희석하듯 포현하긴 했지만, 좀 많이. 많이 많이요. 그런.. 어떤 연유에서 마음은 물론이고, 책상에 앉는 일 자체가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더라구요.
그러다가 이렇게 누워서 쓸, 새싹같은 마음이 생겨났어요. 누워서라도 글을 쓸 수 있는 마음까지 왔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저는 스스로 참 많이 나아진 거라고 평해야 겠어요.
(그런데 쓰다 보니까 저의 마음도 왠지 위로가 되는 것 같네요. 왕왕 이렇게 독자 레터를 써볼까 싶을 정도로. 제 마음이 저 멀리서부터 은은히 데펴져 오는 것이 느껴져요.)
한 소뜸.. 만큼만 더 고백하자면 저는 요즘 마음이 많이 억눌려 있습니다. 정말, 정말 많이 그래요.
그래서 자연스레 자유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있고요. 그것에 대해 저는 정말 할 말이 많은 사람이지만.. 오늘밤은 그렇게 열정적으로 쓸 힘은 없어요. 독자에게-라는 부드러운 미니 형식의 이 글은 그런 톤도 아닌 것 같고요.
오늘은 하나만, 하나만 이야기 해 볼게요. (아, 라디오는 정은채라는 배우가 게스트로 나온 영화음악 프로그램을 듣고 있어요.)
언젠가 다른 글에서도 썼던 이야기이긴 해요. 지금 듣고 있는 디제이가 언젠가 라디오에서 들려 준 이야기였어요.
디제이에게는 저에게처럼 아주 힘든 시기가 있었다고 해요. 아 지금 이 디제이는 아마 젊은 중년 정도의 남자로, 그가 말하는 자신의 어둠의 시기란 아마 그가 지금보다 훨씬 젊었던 한 자락의 시간들이었을 거예요.
그는 당시에 친척이었던가, 친구 집에 얹혀 살며, 별다른 일도 구하지 못하고 있었나봐요. 지금은 그가 피디거든요. 라디오 피디이자 영화음악의 디제이이기도 할 만큼 자리를 잡은 그이지만, 그때의 그는 하루하루가 어두운 청춘의 날들이었던가 봐요.
그날들에 그는 영화를 좋아했데요. 정확히 말하면 아마 야한 영화로 시작했던 날들이었나봐요. 당시에는 새벽에 영화 두 편을 붙여서 연속으로 상영을 하는 심야 상영관이 있었던 시대였다고 해요.
그는 없는 주머니 사정에, 얹혀 사는 집에서 어스름한 밤에 길거리로 나와서 그렇게 저렴한 새벽 영화를 보곤 했다고 해요. 어스름하기도 하고 묘하기도 한, 인생의 그 골목길은 그가 거의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는 탈출구였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의 의도와 달리(?) 그가 연속 상영으로 보게 된 영화들 중에는 가끔 우연히 예술 영화가 있었다고 해요.
그는 그렇게 어두웠던 날들을 야한 영화 속에 뒤섞인 예술 영화들을 보며, 점점 어떤 영화의 깊은 세계로 빠져들어 간 거예요. 그에게 영화가 어떤 의미였을지는 충분히 짐작이 돼요. 한 평도 안 되는 영화관의 비좁은 의자에서 바라보는, 영화라는 드넓은 세계가 젊고 막막한 날들의 그에게 어떤 것이었을지 생각하는 일. 그 일이 저는 왠지 뭉클해요.
젊은 날들의 그에게 영화관은 힘든 현실로부터 피신해 몸을 숨길 수 있는 작은 세계에 불과했지만, 그것은 결코 작은 세계가 아니었을 거예요. 영화라는 세상에서 꿈을 꾼 것은 성공이나, 새로운 제3의 어떤 대상이 아니라 그 꿈 자체가 그에게 꿈같은 시간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해요. 저는 순수하게 꿈을 꾸는 일이 꿈 자체 같아요. 꿈의 절정 같아요. 꿈을 이루게 되든 그렇지 않든. 꿈을 꾸는 시간들이 꿈의 절정인, 소중한 시간들인 것만 같아요. 지금껏 저의 날들은 죄다 그랬던 시간들 뿐이었어요. 꿈 때문에 현재를 지연시키는 날들이었지만, 눈 앞의 소중한 사람들을 바라보지 못하고 사랑도 충분히 하지 못하고 행복도 충분히 느끼지 못하던.. 불안과 애씀의 날들. 그런데 실은 그러던 나의 날들이, 당신과 매일을 함께 하던 우리의 날들이 가장 빛나던 인생의 날들이었다는 것을, 지금은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아무튼 야함으로 접근해서 예술로 가게 된 이야기를 담담히 하는 디제이의 진솔한 고백이 인상 깊었단 말.. 하고 싶었어요. 어떤 진심은 덕질로 향하게 하고, 그것은 또 다시 아름다움이 되어 덕후에게 독특한 무늬를 남길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는데, 그때 디제이의 이야기를 처음 들으며.. 그 길이 정말 신비롭기마저 하게 느껴졌거든요.
지금은 이제 프로그램이 끝나고(팟캐스트여서 대화만 컨텐츠로 들을 수 있고, 중간 중간의 음악이 빠져서 좀 짧거든요.) 마지막곡으로 신해철의 힘겨워하는 연인들에게가 흘러나오는 동안 디제이가 엔딩 멘트를 하고 있어요.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를 들으며 힘겨워하던 때가, 지금은 사무치도록 그리워요. 내 모든 걸 다 주고도 돌아가고 싶을 만큼, 행복했던 날들이었는데.
옛날에 정은채가 영화음악 디제이일 때 그녀의 목소리로 흘러나오는 영화음악 라디오를 정말 좋아했는데.. 그 시간들도 너무 짧게 다 지나가 버리고 말았어요. 그녀의 밝음이 너무 좋고 마음에 들었어요. 달콤했어요. 그녀가 디제이를 하던 느낌. 너무 달콤하고 환해서 마음이 간지럽히듯, 또 가슴이 터질 듯, 설렜어요. 그리워요. 그 라디오를 듣던 날들이.
손에서- 정확히는 왼손의 손바닥 안에서 - 이스트와 달콤한 밀가루가 뒤섞인 식빵 반죽 냄새가 나네요. 이것도 작은 달콤한 세계 같아요. 이스트가 들어간 반죽이 부풀어 오르기를 기다린다는 것, - 정은채의 영화음악 시절 정은채 디제이와도 닮은 듯 - 신선하고 새로운 설렘이네요.
이렇게 쓰다가 잠이 들 수도, 일어나서 부풀려진 식빵 반죽을 오븐에 구워 커피를 내려 마시고 느지막이 잠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이 글을 쓰다 보니 오히려 잠이 다 깨서.. 식빵을 만들어 먹고 이것저것 좀 하다 잘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다들 웃고 있지만 울고 있기도 하다는 것, 저는
이해해요.
우리에게 인생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지만.
버겁기만 하지만.
눈물 나는 날에는 모두 마음 편히 울 수 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