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 주) 마구마구 123이란 마구, 마구, 쓰는 넘버링 에세이를 일컫는다. 물론 필자가 지은, 허무맹랑한 말이다.
1. 지금 중요한 것은 관찰하고 차분해져 하나씩 조용히 나의 일을 하는 것일 것이다. 나의 일이란, 해야 하는 일, 하고 싶은 일, 그리고 (이 대목이 가장 몰입해야 하는 항목인데) 하고 싶고 그래서 꼭 해야 하는 (집중해서 즐겨야 하는) 일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일들을,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조용히 해 나가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관찰하는 일을 나는 중요한 일로 여긴다. 내 마음과 이 세계와, 나를 미워하고, 내가 자신에게 속아 미워할 뻔했던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이다. 날씨를 관찰하고 앙상해지고 있는 나무와, 카페 안의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이다. 관찰, 깊이, 또 가볍고 맑게 멀리서 바라보는 일. 그것은 지금의 나에게 성사와도 같은 일일 것이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한 가지가 있다면, 오해하지 않는 일이다. 관찰을 하며, 한 뜸 열기를 식히고 커피를 마시며, 오해하지 않기 위해 누군가를,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사려 깊은 눈으로 바라보는 일이다. 결코, 마지막까지 오해하지 않는 일이다. 어떤 끝까지 아끼려고, 부둥켜 안으려고, 오해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일이다. 그런 삶의 태도는 나를 숭고하게 하고 격을 높이는 일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성직자처럼.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는 것처럼. 그 눈길 안에 깃든 어떤 것처럼.
그렇게 움직여도 늦지 않다고 믿는 것은, 필자 개인적으로는 **종교적인 믿음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밑도 끝도 없는 믿음. 그것이 나에게 숨을 불어넣는다. 그러니까 때때로 나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생기를, 또한 나 자신도 놀라워할 만한 여유를 불어넣는다. 그러니까 나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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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가 어렸을 때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가 이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이런 글쓰기 플랫폼이나 sns에서 종교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거의 금기시되고 있다. 그나마 남아있던 고마운 팔로워마저 끊길 위기에 놓이게 될 수 있는 분위기가 있다. 하지만 그마저, 정말 그마저 말하지 못한다면, 누가 나를 과연 책임지겠는가. 세상 누가 무슨 희망이 되어 준다고. 이제 나에게는 그나마, 그나마, 하나님이 되어버렸는데도. 그것조차 말하지 못한다면 관용에 관해 글쓰기의 세계는 어떤 포옹으로써 다가올 수 있으며, 필자와 같은 사람에게 무슨 변명을 찾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사랑이다.
2. 솔직히 너무 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이. 하나님이. 이 길은 너무 외롭고 가혹하다.
3. 어제 책상만 치운다는 게 방의 상당한 부분을 청소했다. 정말 말 그대로 ‘가관’이었던 상태였다. 먼지와 머리카락들을 치우고, 지겨울 정도로 함께 하고 있는 개미(s)을 행주로 닦고, 아즈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어서 책과 책 사이에 쳐져있던 거미줄을 걷어냈다. 책 위에 내려앉은 지저분한 먼지들을 타조털 먼지떨이로 털어내고, 쌓여있는 책탑들의 배치를 조금 더 한가롭게, 그러니까 옆으로 넓게 어질러져 있던 작은 책탑들을, 위로 높이 쌓아 방의 공간을 넓히는 길을 택했다. 성난 듯 이불을 화장실에 들고 가서 세차게 수차례 털었다. 책상 위에는 노트북과 태블릿, 성경과, 꼭 읽어야만 하는 책들 이십 여 권(?)만 올려놨다.
기분이 한결 (아무래도 한결은 아닌 것 같아 차마 ‘한결’을 쓰지는 못했다.) 조금은 나아진 듯했다.
집중을 위해서는 정신력을 분산시키는 것들을 정리하는 일이 필요하다. -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의 힘이 또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나였고, 또 그것은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만. 우선 몸을 움직여 행동하다가 뜻하지 않게 마음의 힘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음식을 잘 챙겨 먹고, 잘 쉬어야 한다. 기초 체력이 수반되어야 우울함의 그늘에 습격당하는 일을 최대한 피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워가고 있다. 늘 체력에 관한 한 넘쳐 왔던 나이기에, 이런 것들도 처음 배워간다.)
가령 음악조차 기기의 화면을 끄고도 들을 수 있는 플레이어로 듣는 것이 좋다. 가능하다면 아날로그한 기기로 듣는다면 더욱 좋다. 레트로한 턴테이블이나 구식 오디오나, CD 플레이어를 듣는 것이다. 또는 디지털 기기로 듣더라도 플레이 리스트가 글을 쓰기에 좋게 계속 흘러 나오는 송 리스트를 틀어놓는 것이다. 특히 Chilly한 이 즈음은, 불규칙하게 연주를 하는 브라스가 들어간 재즈가 더 없이 좋다. 선곡에 고민을 할 필요가 없는 클래식 라디오 채널은 언제나 좋은 선택이다.
4. 자유. 이 이야기는 언젠가 꼭 하고 싶었다. 사람에게 자유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절절히 느껴가고 있다. 아니,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이루는 필수 요소인 것이다. 그러니까 가령 사람이 살아가려면 물과 염분, 산소, 그리고 자유가 필요한 것이라는 식의 표현이 가능하고, 자유는 어떤 것보다도 앞서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 안에서 너무나 많은 문제들이 일어나 때로는 다른 사람들을 해치게까지 하니까. 그것의 힘이랄까, 필수불가결성에 대해서 마음속으로 되뇌며 상기하고 있어야 한다. 늘 곱씹어 생각하고,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내 삶이 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삶을 지켜줄 수 있다.
필자가 이런 단어를 쓰거나 입에 올리면 사람들은 역시, 어떤 오해를 하는 방식으로 필자를 포지셔닝 해두었다가, ‘-님에게는 OO가 중요하잖아요?’라고 말하곤 한다. 필자에게는 더 넓은 자유가 필요하고, 자신에게는 그보다 적거나, 심지어 아주 극소량의 자유만 있어도 감사하게 여기는 희생적이고 숭고한 삶을 살아가고 있기라도 하다는 양, 또는 마치 자기에게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기라도 하다는 듯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진솔함이나 자기 성찰의 결핍에서 나오는 태도일 것이다.
혹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하나의 비극이다. 그는 정작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을 대신해 타인이 드러내 놓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누군가 자신을 대변해 주기 때문에 흥미로워하고- 내심 반가워 한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고 만다. 그렇게 삶의 본질과 깊숙이 잇대어 있는 주제에 대해 점잖을 빼며 거리를 두는 태도를 갖는 것은 자기를 교묘하게 학대하는 한 방식일 수 있다.
사람이 사람이기 위해서는 자유의 구십 퍼센트가 필요한가, 팔십 퍼센트가 필요한가. 칠십 퍼센트? 구십 구 퍼센트? 우리에게 자유는 몇 퍼센트가 있어야 하는가. 몇 퍼센트의 자유부터 자유인가. 백 퍼센트, 백 퍼센트.
5. 그리고 사랑은 그것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