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시작하지 못하게 하는.
1
도서관에서 여섯 권의 책을 빌렸고, 배가 고팠다. 도서관 로비의 한 공간에서 이 책들을 펼쳐보고 글을 좀 써 볼까. 마트에 들러 우유와 계란을 사고, 빨래를 하고, 공간을 정리하고, TV를 보고, 요리를 해먹으며 허기짐을 달랠까.
몇 번을 왔다갔다 했다. 로비정문을 나갔다가 들어왔다, 들어왔다가 나갔다가.
문제는 뱃속에서 느껴지는 허기짐과 가난한 마음, 그리고 씻고 나올 때 화장품을 바르지 않아 메말라 가는 피부였다. 생각해보니, 아까 복지형 마트에서에서 싼 값에 산, 대용량의 죠리퐁(이태리 제조회사에서 만든 것이었지만 유통기한이 아마 많이 남지는 않았을)이 있었다. 그거면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건조해서 당기는 겨울철 피부의 문제는 내가 사랑하는 일들을 하다 보면 약간의 기름이 뿜어져 나올 지도 몰랐다.
고민의 시간은, 겨울 저녁의 8시께였다. 나는 정말, 깨끗하고 조용한 도서관 로비에 앉아서 어떤 깊은 짙음으로 들어가는 방향을 택해보고 싶었다. 무언가, 고요와 깊이가 간절했다. 언젠가 남여가 뒤섞인 중학생들이 시험공부를 하며 활기있게 떠들던, 도서관 1층 로비의 공간감과, 독서. 글을 끄적이는 일. 그것들의 설렘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야간자율학습을 하며/도망치며 꿈을 꾸던 날들의 활기와 뜨거움으로 한 번만 빠져들어가 보고 싶었다.
2
성질은 다면적이다. 그늘과 빛, 음과 양, 단조와 장조를 모두 품고 있다. 이러한 규정도 하나의 프레임으로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이 나란 사람의 인격적인 성질은 얼마나 복합적이고 다층적인지.
내 삶에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성질의 하나만 말하자면, 무엇보다 윤리에 민감한 성질을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윤리에 대한 집착은 완성도에 대한 집착이기도 하다. 윤리적으로 올바르고자 하는 마음이 완벽주의적 성질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완성도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성질은 빛과 그늘을 모두 품고 있다. 필자는 원래 신학적 인간이었다. 어떤 양식의 인간이 어떤 식의 인간에 비해 열등하다든지, 어떤 점에 대한 조명과 이해를 부족하도록 한다든지, 수백에서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하나의 학문적 지류에 대해 그렇게 선명하고 단조로운 비평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개인적인 차원에 한해 진솔한 고백을 드러내자면, 나의 신학적 인간은 확실히 나의 문학적 인간에 비해 딱딱하고 경직되어 있는 현실 속에 있었다고 해야겠다.
나는 언제나, 가능한 한 최대한의 나의 모습으로, 완벽해야 했다. 그런 성질은 어떤 일의 시작과 끝의 경직성을 지향하도록 했다. 지나 보니, 사실 어떤 일이든 그냥 하면 되는데. 잘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그냥 하면 되는데.
나의 어깨는 알 수 없는 스트레스들을 받고 있었다. 겉으로는 편안한 척 웃었지만, 두 손은 늘 꼭 주먹을 쥔 채였다. 그냥, 대충 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몰랐다. 내 앞에 놓인 사소하거나 중요한 일들을 나는 잘 시작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물론 잘 끝마치지도 못했고, 그런 상황이야말로 나의 엄격한 윤리적 기준에 위배되는 일이어서 나는 괴로워하며 무력해지곤 했다.
나는 찬양했고, 기도했고, 깨끗이 씻고 단정히 입고는 뛰어다녔지만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갔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이었다. 글쓰기와 책과 문학을 사랑하게 되기 시작한 것은. 나의 그런 방향은 정신적으로 경직되어 있고, 그러한 한편 늘 쾌활한 활기에 차 있던 내 모습에 낯설고 색다른 영향을 주었다. 나는 조금씩 우울감을 띠었다. 표정은 무표정한 날들이 많았다. 그러한 과도기의 날들의 나의 사진을 보면, 정체 모를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웃고 있다 하더라도, 정말 웃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사진 속의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눈코입의 생김새가 아니라, 표정이 그랬다. 과도기의 날들 내내 그랬다. 내 자신이 잘 이해되지도 않았고, 나의 표정이나 눈빛이 마음에 들지도 않았다. 결핍 만큼, 과도기 만큼, 하나의 길이 다른 하나의 길과 화해하지 못한 만큼 그랬다.
생각의 집중성은 이전보다 골똘해졌다. 나는 어떤, 다층적인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글도, 생각도, 말도, 웃음도, 눈물도 그랬다. 무표정한 날들의 이면에서는 다양한 파도가 치고 있었다.
얼핏 그건 어둠의 일 같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왜인지 나는 그것들을 끌어안았다(다, 모두 다). 그러고 싶었던 것인지, 그렇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다. 글을 쓰거나, 음악을 듣고, 책을 읽어나가는 일이 나의 이해의 세계를 넓어지게 하는 일임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그런 일은 경직된 마음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나는 그 세계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부드러워져야 했다. 유연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낯선 세계의 입구로 입장할 수 없었다. 또, 그렇지 않으면 그 세계에 들어가 어떤 과정을 거침으로써 자신이 부드러워지고 유연해져 가는 일을 애초에 느낄 수 없기도 했다. 그것은 최소한의 조건이자 과정이자 결과였다. 그런 마음이라면, 무언가를 그냥 시작하고, 그냥 하고, 그냥 맺을 수도 있을 것만 같다는 감각을 감지할 수 있었다.
3
깊이depth와 넓이extent에 대해 생각한다. 이즈음은 자꾸만, 짙은 어둠에 대해, 또 (그것과 대비되는 것 같지만 아마, 실은 하나일) 빛에 대해, 짙은 어둠과 포개어지는, 실명할 정도로 눈부신 밝음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리고 신이 아니라 인간일 뿐인 내게 그것들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니까, 그러니까 그냥, 그냥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시작을 하고 뛰어들어, 어떤 세계로 넘어가야겠다는 생각.
지금의 시간들이 깊이와 넓이의 시간들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그렇지 못하다면 그런 시간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깊이를 깊게 하고, 넓이를 넓게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무슨 일을 하는 동안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그에 대해 나는 뚜렷한 답을 갖고 있지 않다. 단지 그것을 계속 생각하고 그 일에 머물러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 뿐이다. 그것의 방향이 ‘살음(삶)’이고, ‘사랑’이란 것만 알 뿐이다. 그것이 미움과 증오의 대상들을 다 끌어안을 만큼의 어둠과 빛이어야 한다는 것. 그만치, 두렵도록 숨 막히는, 짙은 깊이에 대한 가늠을 하는 날들을 보내고 있을 뿐이다. 그늘이든, 빛이든 해야겠다.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