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찾은 여유다. 늦은 오후. 깊은 주말 밤에 반가운 동생들을 만나 과음을 하고 말았다. 어쩌면 예견된 일이었을까.
당초에는 해야 할 일들을 미뤄두고 반가움과 여흥을 즐긴다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다. 더욱이 늦가을부터 계속 몸살 기운을 앓고 있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몸살을 앓은 것은 내가 기억하는 한 태어나 처음이었다.
하지만, 나는 또 가고 말았다. 혼자서 한 병에 가까운 와인과 약간의 탁주를 더 해 마시며 쉴 새 없이 떠들었다. 그리고는 늦은 새벽, 토트넘 선수단이 등장하는 것을 보고, 나의 시야도 암전되었다.
너무 작고 작아. 너무. 너무 작은 세상이야.
그렇게 집에 돌아온 주말 밤, 나는 또 무슨 정신인지 베이컨을 굽고, 계란 프라이를 하고, 양상추와 노란 피망 등을 동원해 곡물 식빵 샌드위치를 해 먹었다. 뜨거운 아메리카노와 함께, 그것들을 맛있고도 게걸스럽게 먹었다. 역시 티브이로는 연애 예능을 틀어 놓고. 완벽에 가까운 식사였다. 그리고도 남아있던 콩나물 야채 국밥을 한 그릇 더 해치우고 그렇게 쓰러졌다. 그리고 또 암전.
깨어보니 역시 밖이 환히 밝았다. 피로는 다 풀리지 않았다. 피곤해도 일어나야 하는데. 그런데 일어나면 또 뭐 해. 도대체 뭐 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해.
물론 피곤함도 채 가시지 않았고 말이다. 나는 ‘일단은’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서 일단은, 누운 채 태블릿을 옆으로 눕혀 관심 있는 영상들을 틀어보았다. 태블릿도 나도 옆으로 가만히 누워 있었다. 볼 것들은 끝이 없었다. 꼭 필요한 것만 빼고 안 보아야지, 생각하던 날들의 반복. 어떤 반복. 반복의 반복.
나는 노인과 바다의 노인 같았다. 겉으로는 가만히 살아가는, 평화로운 날들을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실은 아주 역동적인 사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희망과 쉼에 관한 것이었다. 하지만희망도, 쉼도,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하여, 근자 나의 사투는 소강상태가 되었다. 나는 마치 11라운드의 육중한 거구 같았다. 거구들이 아기처럼 서로에게 안기며 늘어지는 듯한 모습으로, 몇 날 밤 몇 날 낮을 보냈다.
그러니까 오늘도 나는 자신이 작은 치와와인 양 낑낑거리며 시름했다. 오후 늦게까지 몸을 끙끙거리며 이쪽저쪽으로 돌아눕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혼잣말을 했다.
이제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데-그때 메모를 하려고 했지만. 그것조차 하기 싫을 만큼 나는 어떤 품속으로 파고들고 싶기만 했으니까. 마치 늦은 오후의 어스름함이 칭얼거리며 파고들고 싶은 연인의 어깨라도 되는 것처럼.- 혼자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던 말을 그대로 메모하지 않아 이제는 다소 흩어진 문장이 되어 버렸다. 그것은 어쨌든 대충 이런 말이었다. 작고 작은 세계. 너무 작고 작은 세계를 살고 있어.
똑같은 곳들을 가고, 똑같은 고민들을 하고, 마트나 시장에서 파는 몇 가지 똑같은 음식들을 사 와서는 엉터리 요리를 해 먹고, 어쩌다 근사한 맛이 나는 요리에 성공하면 너무나 작은 소시민처럼 그것에 어떤 부끄럽고 멍청한 흡족함을 느끼고, 똑같은 사람들을 만나 비슷한 말들을 지껄였다. 그리고 그 지겨운 가성비, 가성비. 소심함, 소심함. 작음, 작음.
내 시간은 하나같이 지겨웠고, 그것은 내가 지겨운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말과, 거의 오차가 없는 동의어였다.
거창한 밑그림을 그리며 살아가는 삶만이, 대인배만이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리라는 것쯤, 물론 필자는 다 알고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허영심이나 망상이나 환상에 사로잡힌 사람은 아니다. 나의 사투는 아주 정직하고 담백한 고백의 다름이 아닌 것이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것은 희망과 쉼일 뿐이었다. 소박하고도 근원적인 것.
희망이 있는가. 쉼이 있는가. 그리고 또 그것은 정말 어디에 있는지. 그것은 누구로부터 오는지. 나의 자유와 의지인지. 신의 자유와 그의 의지인지. 그 모든 것이 작용하고 반작용하는, 무한의 신비인지.
희망으로 빛나고, 쉼으로 암흑이 되기를 반복할 수 있기만 한, 건강한 서클. 태양이 뜨고 달이 뜨듯이, 달이 지고 다시 태양이 뜨듯이. 여름이 오고 겨울이 오듯이. 성탄절과 흰 눈. 그리고 강한 동해안의 해에 피부가 타 껍질이 벗겨지는 여름이 오듯이. 헤, 입을 벌리고 마루에 앉아, 국물을 흘리며 수박을 먹다가 몇 달 후에는 차디찬 베란다의 박스에서 시원한 귤을 꺼내 먹듯이. 햇볕처럼 쨍한 희망과, 명랑한 웃음과, 다시 온전히 깊은 쉼. 그것들이 리드미컬하게 흥겹게 왕래하는 시간으로부터, 도대체 나는 얼마나 멀어져 있는 것인지.
그런 것들을 이제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초겨울 속에서 몸살 기운은 (그럴 법하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애 멎은 원인일 수도 있는 난방과 온수 샤워의 문제로 시선을 돌리지 않더라도) 어쩌면 필연적이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안 그래도 나는, 자꾸 무언가의 품속으로 파고들고 싶어 할 만하다.
그런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아무튼 다만, 나는 무언가를 꼭 붙들고 싶어 하고 있었다. 그래서 몸과 어깨와 손바닥은 언제나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그것들은 분명히 희망과 쉼인데, 그래서 그것들은 무엇일까. 구체적으로 어떤 희망이며, 어떤 식의 쉼일까. 정말이지 사투와도 같은, 이 격정적인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에는 첼리스트와 콘트라베이시스트가 필요하다. 소박하고 담백하게 자기 나무의 통을 울리며 현을 긁어 울며 공명할 수 있는 저음의 악기가 필요하다. 나의 쉼은 거기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나의 분명한 희망도, 아마 거기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