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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읽고 좋아요 누르기.

by jungsin






좋아요가 정말 좋아요는 아니었다. 그것은 스크랩해도 될까요?-였다. 나는 정신의 여유가 없었다. 무엇을 하든 그랬다. 어떤 일도 집중해서 하나만 하기 어려울 만큼 멀티 태스킹의 압박은 흔한 일이 되었다.


나는 안 읽고 좋아요를 눌러야 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혼잣말처럼 생각했다. 나중에 읽어보겠습니다. 또는, 일단 읽기 후보에 올려 놓을게요.


하지만 정직하게 바라보면 대체적으로 나는 시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 내게 없는 것은 여유였다. 정신의 여유 공간. 그것이 없음으로 체력의 공간마저 없곤 했지만. 어쨌든 그것은 ‘정신’의 문제였다.


나의 영혼은 언제나 무언가로 꽉 차 있었다. 지금 당장, 누군가가 쓴 소중한 글을 읽을 마음의 여유도 없을 만치. 하지만 좋아요는 눌러 미지의 내면의 공간에 저장을 하거나, 어떤 답례는 해야만 했을 만치.




아무튼 호기심 많은 내게, 관심과 흥미를 끄는 글들의 알림은 넘쳐났다. 할 것이 많다는 것이 때로는 스트레스이기도 했지만, 그것은 신남이기도 했다. 읽을 것이 많고 쓸 것이 많다는 것. 그건 놀 친구가 많다는 뜻이었다. 세상은 신나는 롯데월드 같았다. 하지만 나는 어리석은 프리 유저였다. 손에 자유이용권을 꼭 쥐고는 놀이동산을 종횡무진 돌아다니기만 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타지 않고 말이다.


퍼레이드도 구경하고, 바이킹에 앉아 소리지르는 연인도 구경하지만, 당장 나는 무언가의 속에도 들어가 있지는 않다. 어떤 놀이기구의 행렬에도 섣불리 들어가 서지 않는다. 그렇게 어느덧 날은 어둑어둑해 지고, 지쳐서 이제 아무것도 탈 힘이 없어져 버려, 놀이동산을 나가 잠실역으로 돌아간다. 여전히 손에는 자유이용권을 꼭 쥐고. 그것은 이제 이상한 기념품이 되고 만다.


차라리 이럴 거였다면 빅파이브 이용권을 끊고 순서대로 딱 다섯 개만 탈 걸. 바이킹부터 시작해서, 신밧드의 모험을 거쳐 후룹라이드까지. 알차게 딱 다섯 개만 타고, 추로스 집에 가서 추로스와 라떼를 사먹으며 앉아, 사람들이나 구경할 걸.


물론 읽은 글들도 꽤(또는 더러) 있었다. 내 관심을 끄는 작가들도 더러는 있었다. (피하고 싶은 표현이지만 어쩔 수 없이 더러는…이라고 표현해야 했던 본질적인 이유는, 아마도 그만큼 내가 개성이 뚜렷한 작가나 글을 좋아해서인 것 같다. 반대로 나의 이런 취향이나 성질은, 모호한 것들에 대한 지나친 경멸을 내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랔(like) 후독이랄까. 그렇게 좋아요를 누른 글과 sns의 컨텐츠들을 다 합치면, 벌써 수천 수만 개는 족히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익히 경험하여 모두들 알다시피 후독이란 없다. 그렇게 쌓인 글과 sns 게시물들을 나는 살아있는 동안 반도, 반이 아니라면 반의 반도 다시 열어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정말이지, 그저 무언가를 잃어버린다는 느낌이 싫었다. 그 순간 읽지 못하는 글은 좋아요라도 눌러놔야 했다. 좋아요를 안 누르면, 이제 그 글은 아마 나의 시간의 가시권에서 어느새 멀리, 멀리 사라져버려 나는 그것을 결국 잃어버릴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잃어버리면 잃어버리는 대로 두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까 죽은시인의사회의 키팅 선생님의 음산한 속삭임처럼,


카르페.. 디엠…

카르페…. 디엠….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책상이, 나의 꿈의 자리다.





내실있게 한 권의 소설을 읽고 싶다. 지금 읽지 않으면 사라져버릴 소설들을 가슴에 삼켜야 한다. 스토너, 모비딕, 달러웨이 부인, 까라마조프의 형제들, 죄와 벌, 안나 까레니나, 로리타, 관객모독, 1984, 이방인, 데미안, 더블리너스, 아가사 크리스티 전집, 비행운, 낮의 집 밤의 집, 사랑의 생애, 82년생 김지영, 항구의 사랑, 노르웨이의 숲.


빌어먹을 책탑 사진이든 리뷰든 서평 따위 sns에 남기려는 생각 같은 것 다 집어치우고. 바로 지금 가장 읽고 싶은 소설 한 권을 집어들고, 앉은 자리에서 다 보고는, 활활 불타는 겨울철의 벽난로 안에 책을 던져 넣고 덮개를 잠궈 버리겠다는 마음으로 봐야 한다.


지금 다 못 본 페이지는 이제 내 인생에 없는 페이지라고. 이번 주에 읽지 못한 책은 다음 주면 풍선처럼 다 하늘로 날아올가 버릴 것이라고. 맑고 또렷한 정신으로. 어떤 성스러운 일을 대하듯이, 지금이라는 시간의 성소를 매순간 불태워버리는 사제처럼. 연소와 휘발의 독서를. 미치광이의 벽난로 독서를.



무엇을 남기려는 생각, 이익을 얻으려는 생각으로 순수하게 좋아하는 대상에 다가가서는 안 된다. 오히려 알차게 태워 버리려는 생각으로, 그리고는 깨끗이 지워 버리려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읽어 나가고써 나가며 사랑해야 한다.


지금 하지 않으면, 읽지 않으면, 나에게 그것은 허락되지 않은 책이며, 시간이며,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런 방식으로 시간을 바라보지 않으면 나는 한심한 아저씨나 구닥다리 노인네가 될 것이다. 어떤 이야기의 본질도 제대로 깊이 더듬어보지 못한 채 알은 체와 이름의 껍질만 남은. 지금은 없고 과거만 남은.


어쩌면 지금을 사는 청춘이 되는 유일한 법은, 지금을 사는 방법 뿐일 것이다. 에버그린, 청춘이 되려면 청춘처럼 시간을 보아야 한다. 나는 거대한 역사가 아니다. 작고 작은 청춘이다.









작은 Epilog

https://youtu.be/GjPfhpJYeQY?si=XmcLuqvWkg6nQl7l

그리고 지금, 윤상. (그의 음악은 지금과 닮아 있다.) 곡명은 ‘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