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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w한

by jungsin



어떤 생각을 하는지가 가장 중요해. 기교는 다음 문제일 뿐.

카잘스.

- ‘일요일의 음악실’ (송은혜 지음) 중에서




차가운 금속 텀블러에 담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씩 들이삼켰다. 얼음과 물을 담고, 일리 원두로 내린 에스프레소를 부은 커피가 달콤하다.



어느새, 애착 텀블러가 되어가는 나의 금속 텀블러





아주 오래 전, 24시간 카페에서 새벽을 넘어 밤이 새도록 자기소개서를 쓰던 시절. 당시에 나는 일리 커피의 철학을 즐겨 인용하곤 했다. 교회 사역자 지원 용도로 제출하려던 자소서에 난데없이 ‘맛있는 한 잔의 에스프레소’라는 일리 커피의 카피를 집어 넣은 것이다. 커피의 본질에 집중하는 그 회사의 철학이 마음에 든다며. 그 회사는 본질적이고 RAW한(날것의) 커피맛을 추구한다며. 나도 ‘RAW 전도사’라며, 그런 사역자 후보라며. 나댔었다. 말 잘 듣고 충실히 기능해서 교회에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을 뿐일 교회 인사 담당자들의 메일에 그런 자소서를 뿌리곤 했다. 밤새도록 앉아 있어서 낙엽처럼 점점 축축해지는 몸과 떡지는 머리를 애써 외면하면서, 그토록 세상물정 모르는 듯한 말들을 혼자 좋아라 밤새 소설처럼 쓰곤 했다.





카잘스는 대부분의 첼리스트가 연습곡 정도로만 생각했던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무대 위로 올렸다. 카잘스가 활동하던 당대에는 화려함과 기교에 취해 있는 경향의 연주 풍토가 있었는데 왜인지 그는 반대의 길을 가려 애썼다.


그는 첼로라는 악기의 물리적 한계를 이해하고 오히려 첼로의 본질로 파고들려고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무용곡의 반주 격 역할에 한정되어 있던 첼로라는 악기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다른 연주자들의 그것과 다른 것이었다.


그는 연주가 아닌 음악을 바라봤다. 기교가 아닌 담백한 본질에 집중하려고 했다. 이러한 관점은 다른 연주자들에게는 단조로워 보이기만 하던 바흐의 무반조 첼로 모음곡의 아름다움을 꿰뚫어보도록 하기까지 했다.



“감정에 취한 연주로 작곡자의 의도는 뿌옇게 흐려지기 일쑤였던 후기 낭만 무대 위에서 카잘스는 숱을 쳐낸 듯 가볍고 담백한 색채를 들려줬어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작곡자가 원하는 바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던 그의 연주는 당시 연주계에 신선한 돌풍을 일으켰답니다.”


- 송은혜, ‘일요일의 음악실’



카잘스. illy. Bach. 글렌 굴드. 에스프레소. 무반주 첼로 조곡. 나는 왜인지 그런 것들에 자꾸 마음을 빼앗긴다.


유치원생이 신경질적으로 그림을 그리다 크레파스를 뿌러트리곤 하는 것과 같은 날들만 늘 보내고 있다. 나의 고지식함과 강박적 성향. 이상주의적이고 감상주의적인 성격. 그리고 그러한 성질 이면의 짙은 불안과 상실감. 두려움. 여림. 무기력감. 그런 것들이 꽉 막혀 멍들어 있는 멍 덩어리.


같은 멍을 매일 그린다. 끝도 없이, 끝도 없이. 멍이 피어나는 어떤 그림을 상상하면서. 그림 그리면서. 몽우리가 터지기를. 풀려나고 해방되어, 날개짓 하는 순간을.


그런 시간을 그리면서, 자꾸 바흐만, 굴드만 틀어놓고. 무기력하게 멍하니 듣는다. 커피는 도무지 질리지도 않는지. 커피와 바흐뿐. 인생에는 아무것도 없다. 바흐로 시작해 바흐로 끝나고, 커피로 시작해 커피로 마친다. 하루의 마지막 순간까지 마시다가, 토한 농약처럼 입가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묻히고 잠들곤 한다.






https://youtu.be/4KoqLHFc4LA?si=FPj1phOHT9UjNHFg

raw한 라디오헤드 크립. (성속 이원론에 빠져 아주 오랫동안 듣지 않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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