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힘. 정말 사랑. 정말 희망.
그것은 무엇일까.
누워서 폰으로 쓴다. 사는 게 참 힘이 든다. 밥을 먹으려면 밥을 해야 하고. 먹으면 치워야 하고. 밥을 먹었으니 이제 적당히 뱃속을 기분 좋게 해줄 커피를 내려야 하고. 커피만 먹기는 심심하니 곁들어 먹을 것도 준비해야 한다.
이즈음은 피아노 위에서 무언가를 하기를 즐기고는 했다. 피아노의 왼쪽에는 아끼는 히터가 있고 반대편에는 발코니가 있다. 피아노와 그것을 둘러싼 작은 공간이, 뜻밖에 각을 잡고 무언가를 하는 공간처럼 되고 있었다. 글을 쓰거나 그외 무언가 즐거운 일, 즐겁지 않지만 해야 하는 일들을 하는. 마치 앨리스의 모험에서 맨홀 뚜껑 아래로 빠져 들어가면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듯이, 어느덧 이 자그마한 공간이 쉼과 일을 구분해주는 경계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오늘밤에도 피아노 위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배가 고파져(야속한 배는 쉴새 없이 고프다), 새벽에 김치볶음밥을 해먹고, 그 추진력에 이어 지체없이 커피를 내려 먹었다. 그리고 다시 피아노 앞에 앉으려는데 마음이 너무 힘이 들었다. 먹고 치우느라, 그새 몸이 지친 것이다. 다시 사무 공간 같은 피아노 공간 안으로 들어가려니, 짜증스럽고 힘들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때로는 달콤했던 피아노 사무실이 내 영혼을 가두는 감옥같이 느껴졌다.
포기하기로 했다. 끙끙거리며 앉지 말고, 그 안으로 들어가기를 포기하기로. 그래야만 할 것 같았는데. 왜인지 다시 저 안으로 들어가야만 할 것 같았는데. 그러지 않고 쉬기로 결정하니 종이 한 장의 차이처럼 금새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신혼 부부가 침실에 들어가듯 서둘러 피아노 위에 펼쳐 있던 노트북이나 태블릿과 폰을 다 철수하고 이불 위에 누웠다. 누워서 재즈 플레이리트를 틀어놓고 쓰려던 글을 쓰려니 이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이렇게 누워서 쓰면 되는데. 그토록 나는, 무엇에 쫓기며 긴장했을까.
지독한 겨울이다.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 날의 숫자가 주는 게 아니라 늘어간다.
동네에 물건이나 먹을 것들을 싸게 파는 복지형 마트가 있다. 그곳에 가는 일은 내게, 점점 하나의 마중물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나는 집을 너무나 나가고 싶은데, 너무나도 나가고 싶지 않다. 양가적 감정의 치열한 밀어냄 속에서 작은 단초처럼 복지형 마트가 떠오르는 것이다.
우선 복지형 마트에만 가자-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혹독한 겨울 추위를 뚫고 나가게 되면, 조금 더 멀리 있는 대형 마트에서 생크림도 사게 되고, 조금 더 멀리 있는 노브랜드에 들러 우유나 요플레, 그린 올리브, 또는 요즘처럼 아시안컵을 즐기며 놀고 싶은 날(?)은 급기야 맥주까지 사곤 하는 것이다.
그러다 더 멀리 있는 또 다른 대형 마트에 들러서 조리 식품을 사며 근처의 손두부 맛집을 들러 손두부를 사기도 한다. 그러다가 아득히 멀게만 느껴지던, 나의 살던 고향 동네까지 진출한다. 그 도시의 한 모퉁이 길가에 있는 빵집에 들어가, 나무 매대 위에 영롱하게 앉아있는 치즈 식빵이나 올리브 식빵을 사고, 내친 김에 중고 서점을 들리기도 한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도서관에 들어가 책을 빌리거나 글을 쓰기도 하는 것이다.
일단 나가면 이 모든 일을 하는 일은 어떻게든 진행이 된다. 정말 힘든 날이 아니면 복지형 마트만 들렀다가 바로 자취집으로 돌아오는 경우는 드물다. 문제는 나가기 전의 저주다. 이상하리만치 나는 복지형 가게가 문을 닫을 무렵 아슬아슬하게 도착하는 시간을, 귀신처럼 맞춰서 문을 박차며 뛰쳐나가곤 한다. 그렇게 누가 보면 화가 난 사람처럼, 복잡한 사연이 있는 사람처럼 씩씩거리며 골목길을 나선다.
그곳은 7시에 문을 닫는데, 자취집에서 그곳까지 자전거로 걸리는 시간은 10분 정도이다. 그리고 집에서 자전거를 빌리는 곳까지는 걸어서 삼 분 정도가 걸린다. 그러니까 최소한 20분 전에는 집을 나서야 마트에서 물건을 집어 카운터에 다가가 결제를 하고 유유히, 우아하게 가게를 나설 수 있는데. 내가 집을 나서는 시간의 80퍼센트는 6시 45분에서 47분 사이다.
맹렬히 자전거 패달을 구르면 7분 정도만에 가게에 도착할 수 있다. 입장하며 팔목을 돌려 시계를 보면 6시 58-59분. 나는 마치 살것이 정해져 있던 사람처럼,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땅땅땅- 대구 냉동 납작 만두와 식빵조리 믹스, 천하장사 소시지를 집어들고 초조한 마음으로 계산대에 선다. 그리고는 교양있게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라고 말하며 물건을 숄더백에 쑤셔넣고 도망치듯 가게를 빠져나온다.
실은, 내 손에 들린 것들 중 무엇도 필수 식료품은 아니었다. 집에는 가령 식용유도 없고 원두도 없고 반찬거리도 없었으며, 밥을 잘못해 법랑 냄비 바닥에 눌러 붙은 탄 자국을 닦아낼 베이킹 소다도 필요했는데.
그러니까 나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었을 뿐, 장을 보러 간 것이 아니었다. 나가야 하는데.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데. 겁쟁이 철학자는 마지막 순간까지 끙끙 앓으며 고심한다. 그러다가 어디서 힘이 샘솟았는지 별안간 스프링처럼 튀어오른다. 경기 시간에 맞춰 선수촌에서 올림픽 경기장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 국가대표 선수나, 낯선 수능 시험장에 제시간에 도착해야만 하는데 날이 훤히 밝아오는 새벽녘 아슬아슬하게 집을 나선 고삼 학생처럼, 이내 옷을 대충 껴입고 허겁지겁 뛰어나간다.
나의 이런 괴상한 행위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떠올리게 한다. 하나의 세계로 나가기 위해서는 단단한 알의 껍질을 깨고 나가야만 한다. 나와 외부 세계 사이에 어떤 긴장과 두려움이, 표현하기 힘든 팽팽한 힘이 존재한다.
줄탁동시. 캄캄한, 알의 내부의 세계에서는 새끼 새가 부리로 알의 안쪽을 쪼아댄다. 동시에 밖의 세계에서는 어미새가 알의 바깥쪽을 쪼아댄다. 그렇게 안팎의 간절한 쫌이 알의 안팎에 자그마한 균열을 만들고, 마침내 알이 갈라지며 갈라짐 사이로 세상의 빛이 들어온다. 어미와 새끼는 그렇게 서로의 눈을 마주치며 마침내 감동적인 첫 조우를 하게 된다.
신성한 순간이다. 처음 만나는 것인데. 마치 재회 같은. 신비로운 재회, 같은 첫 눈맞춤. 부둥켜 안음. 품음.
마치 문 앞에 거구의 혼령들이 문을 온몸으로 막고 있기라도 하듯, 또는 요망한 요정들이 갖가지 술수를 써서 나가지 못하게 만들기라도 하듯, 나가기 직전 한 이십 분 전부터 나는 밖으로 나가기 위해 가장 많은 힘을 써야만 하곤 했다. 거대한 철 덩어리로 이뤄진 로켓을, 중력을 거슬러 대기 중으로 쏘아올리기 위해서는 처음 몇 분간의 시간 동안, 가장 집중적인 질량의 추진 에너지가 필요하듯 말이다.
마침내 복지형 마트가 문을 닫기 전 20분 전에 육중한 몸을 마음을 겨우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대충 청바지에 발을 넣고, 털장갑을 검은색 숄더백에 던져 넣고, 갑각류의 껍질처럼 온몸을 온 마음을 덮어 줄 롱패딩을 입는다. 가방에 아이패드와 책 몇 권까지 넣고, 가죽 워커를 신는다. 자전거 스테이션을 향해 다급히 걷는다 뛰어간다.
군더더기 동작 하나 없이 나갈 채비를 해야 하는, 이 다급한 순간에는 가끔 헛웃음이 터지게 하는 일들이 발생한다. 가령 방금까지 손에 들고 있던 폰이 안 보인다든지. 지갑이나 털장갑이 안 보인다든지. 하필 그 순간에 꼭 갖고 나가고 싶던 책이 안 보이는 것이다.
나를 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요괴가 내 뒷머리채를 잡고 끌어당기는 듯한 강력한 구심력과, 선한 의지로 가득해 처연하고 안쓰럽기마저 한 원심력 사이의 팽팽한 장력. 그 힘의 균형은 어떤 식으로든 깨지곤 하는데. 8할 정도의 확률로 원심력이 이긴다. 하지만 복지형 마트에 도착했을 때 마트의 문이 이제 막 닫힌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할 확률이 통계적으로 20 퍼센트 정도가 되므로, 나의 인공위성 로켓이 의도했던 정상 궤도에 오차 없이 안착하는 확률은 약 60-70 퍼센트 정도다.
하지만 복지형 마트는 말했듯 마중물 같은 것이었으므로, 문이 닫혀 있어도, 실은 상관 없었다. 결국 나는 나가서 어떤.. 모종의 일들을 나름대로 잘 해내곤 한다.
이런 순간들을 단계적으로 밟아나갈 때면, 몸에서 안 좋은 독소들이 빠져나가는 것만 같다. 약간 숨이 차게 걷거나 뛰고 자전거를 타는 과정에서, 어디 빠져나갈 숨구멍을 찾지 못하고 몸 안에 고여 있던 천연 가스가 피부의 모공으로 빠져나간다.
알 수 없는 성취감. 상쾌함. 활기. 의욕. 욕망. 미열. 꿈. 그리움. 그러한 것들을 세상의 공기와 함께 호흡하며 느낀다. 살아있는 것이다. 아직, 내가 살아있었던 것이다. 작년에, 재작년에, 삼십년 전에도 왔던 활기가 죽지도 않고 또 온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렇게 끝난다면 원심력만 선이라고 이해되고 말 것이다. 원심력이 선이라는 사실은 아직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여전히 이처럼 선이지만, 더 근원적인 안식이 있으니. 그것은 구심력의 선이다. 악이라고만 생각했던 그것에 대해 무언가, 표현하기 힘든 것들을 난 차츰 깨달아 가고 있다.
괜찮아. 나가지 않아도, 못해도, 다 실패해도 괜찮아. 잘, 못해도. 잘못해도. 괜찮아. 구심력이 이겼을 때 나는 때때로 표피적인 패배감보다 더 짙고 아득한 세계를 본다. 그것은 묘한 안도감 같은 것이다.
복지형 마트에 안 가도 괜찮아. 지금 어떤 네 결정을 기다리고 계실 목사님에게 문자를 안 보내도 괜찮아. 다 괜찮아. 집에서 한도 없이 쉬어도 괜찮아. 만일 이렇게 아무것도 잘 못하고, 안 해도 괜찮지 않으면, 아무래도 괜찮지 않으면. 어떤 순간에도 괜찮지 못하면. 그건 어떤 순간에도 정말 괜찮은 게 아니야. 어떤 일을 얼마나 잘 해도 잘 한 것이 아니고, 얼마나 활기 있어도 활기 있는 것이 아니야. 어떤 희망이 있어도 희망이 아니야. 널 끌어당기는 요정과 눈을 마주치고 깊이깊이, 밤새도록 대화해 봐. 왜 그렇게 널 끌어당기는지. 너는 왜 그렇게 끙끙거리며 앓는지.
그리고 정말 힘을 가져. 정말, 아름다워져. 정말 말이야.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