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끔찍이 사랑하는 누군가의 시선으로
밑줄과 별표. 빨간색 펜으로. *****
항상 바쁘기만 하다. 한 번에 몇 가지 일을 동시에 하면서도, 할 일은 항상 그 뒤로도 숙제처럼 여전히 더 남아있다. 신비로운 시간들이다.
시대의 분주한 공기 속에서, 보이지 않는 거대 저항을 뚫고 빈둥거릴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어떤 힘 때문이다. 여유와 자신감 때문이다.
빈둥거림은 멍하게 입술이나 손톱을 뜯으며 초조하게 서성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표현된다. 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거나, 화장대에 앉아 거울을 보거나, 콧구멍 속을 깨끗이 청소하거나, 손톱을 자르거나, 글을 쓰거나. 빈둥거리는 사람은 이상하게 차분하다. 그토록 자질구레한 일들을 하는 동안, 점점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방향으로 마음의 가닥이 잡힌다.
정말 모든 정신을 멈추고, 빈둥거리다 보면 급기야 글을 쓰게 되고는 한다는 점에서 글쓰기는 어떤 빈둥거림의 정점이 될 수 있다. 모 작가는 글을 쓰기 전 빈둥의 극치를 즐긴다. 바퀴가 달린 플라스틱 마사지 기기로 뒷목을 문지르기도 하고, 가만히 침대에 누워서 눈을 깜빡이면서 천장을 바라보기도 한다. 커피 테이블에 앉아서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기도 한다. 권태로울 정도로 그것들을 즐기면서, 그는 이 모든 행동들이 '일'이라고 말한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보여도 자신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소설을 쓰고자 하는 누군가에게 제안한다. 우선 인터넷의 연결을 차단하라고. 폰을 끄고, 혼자 있으라고. 그리고 자기의 속에서, 또는 자기의 주변을 떠도는 생각들에 고요하고 집요하게 집중해 보라고. 그러면 어느새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떠오르는 이야기의 세계에 빠져들어 완전히 다른 세계에 가 있게 될 것이라며.
빈둥거림은 어쩌면 작가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하든, 오늘처럼 아시안컵 축구를 앞두고, 자취집의 인터넷이 안 될 때. 당황치 않고 마음껏 빈둥거리며 24시간 카페를 전전하고, 고요히 손흥민을 꿈꾸는 것이다. 폭풍의 언덕을 쓴 에밀리 브론테를 생각하고,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를 가장 좋아했다던 글렌 굴드를 꿈꾸고, 롤리타를 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틀림없이 변태스럽지만) 섬세하고 고상하기마저 해 아름답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내면의 심연을 그려 보는 것이다.
그것은 인생이기도 하다. 그럴 수 있다는 것. 그렇게 자신 있고 여유 있다는 것. 빈둥거리며 자신을 예열하는 일. 20대의 여대생 아이가, 남들은 다 도서관의 칸막이 책상에 갇혀 필기노트를 달달 외우고 있는 시험기간에 커다란 후드티를 입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는 학교의 작은 카우치에 느긋하게 기대앉아서, 무릎 위에 노트북을 얹어놓고 자기만의 연애 이야기를, 끝도 없이 쓰는 일. 사냥꾼에게 쫓기는 노루처럼 현실에 마음이 쫓겨 영혼이 다 거칠게 메말라버린 남자가 불쑥 대학의 큰 도서관 한 구석에 숨어서 오르한 파묵의 새로운 인생을 단 침을 삼켜가며 읽거나, 자취집의 작은 방에 있는 화장대 앞에 앉아 좌절하면서 멍하니 거울 속의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일. 그렇게 지나왔던 시간들의 나와 남아있는 나날들의 나를 아득히 반추해 보는 일.
낡고 고루한 생의 길가를 서성이는 누군가를 온 세상에서 유일하게 끔찍이 사랑하는 존재가, 도대체 그를 삼촌이나 고모부가 다그치는 것처럼 다그칠 수 있을까- 한번 생각해 보라.
빈둥거리는 영혼은 생의 주변이 아니라, 어쩌면 시간과 존재의 중심에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솟아오르든 꺼지든, 날아오르든 날개가 찢겨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황량한 야산 한구석의 바위 밑에 웅크린 채 빗물에 젖어 흐르는 피를 바라보며 무기력하게 울고 있든. 그는 필시 자기만의 방식으로 빛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