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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시시

by jungsin




날씨는 추적추적했다. 레인코트를 입고 가방 두 개를 이고, 동네 우동집을 찾았다. 키오스크 앞에서 나는 또 헤메고 있었다. ‘상품 선택’이란 탭을 누르기가 무척 어렵게 되어 있어 계속 애쓰고 있었다. 엊그제 K 치킨 집의 경험을 살려 고집을 버리고 중간에 포기를 하기로 했다.


돌아보니 내 뒤에는 귀엽게 생긴 여학생이 서 있었다. 먼저 하세요. (배시시 웃으면서) 아니에요. 먼저 하세요.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이 꼬마 같은 여자 아이의 친절함이 달콤했다.


다시 하려고 했지만, 역시 안 되었다. 저도 뭐가 잘 안되서 먼저 하세요. 저는 나중에 다시 해볼게요. 네..하. 배시시.


여학생도 뭔가 문제가 있는지 키오스크에서 결제 취소 같은 걸 해야 하는 것 같았다. 연신 주방에 계신 아주머니(음식을 만들면서 작은 우동집의 모든 일을 다 맡고 계셨다)에게 가서 무언가를 말하고 다시 키오스크로 돌아오며, 무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아이는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긍정적이고 밝은 에너지 뿐이었다. 특별히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아도 1초만에 사람의 마음이 느껴질 때가 있다. 너무나 선하고, 희망이 가득해 보였다. 자라며 사랑을 많이 받았는지 주변 사람들이 다 여자 아이의 밝은 에너지에 혼을 빼앗길 것 같은 배시시-창백미 같은 것이 있었다.


여자 아이가 키오스크를 비우고 아주머니와 소통을 하고 있는 사이 나는 다시 키오스크 앞에 섰다. 아까와 똑같았다. 주문하실 상품을 선택해 주세요. 상품을 누를 때마다 같은 목소리가 계속 반복되어 나왔다. 주문 할 상품을 눌렀는데 왜 자꾸 상품을 또 선택하라고 하지. 주문하실 상품을 선택해 주세요. 주문하실 상품을 선택해 주세요. X7…


혹시 이거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 나도 모르게 뒤에 서 있던 그 여자 아이한테 물어보았다. 성큼 다가오더니 상품을 누르고 옆으로 당겨보면서 어떻게 했는데.. 상품이 선택되었다. 오! 감사합니다. 하... 아니에요. 하.. 배시시.


단촐하게 우동 한 그릇을 시키고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여자 아이도 문제를 해결했는지, 나에 뒤이어 다시 주문을 하고 있었다.


나의 마음은 이토록 주름지고 무거운데. 밝음과 긍정, 어린 아이 같은 해맑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누군갈 보니, 무언가 잠자던 감각이 깨어나는 것 같았다. 마음 부자.. 순수한 꿈과 희망. 그건 아주 오래된, 하지만 하얗게 잊고 있던 나의 추구미 같은 것이었다.


후루룩 쩝쩝.. 크허. 우동을 한 젓가락씩 집어먹으며 오물오물 씹을 때마다 가게 정경을 보았다. 내 옆에는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여학생 두 명이 돈가스 같은 걸 먹으며 조잘조잘대고 있었고, 맞은 편에도 고등학생 커플이 귀엽게 나란히 앉아 음식을 먹고 있었다. 저쪽 건너편에도 어린 학생들이 돈가스나 덮밥류의 귀여운 음식들을 먹고 있었다. 너무나 정겨운 내부 정경이었다.


시선을 지나치며 슬쩍슬쩍 대각선 좁은 테이블에 앉은 그 아이가 혼자 우동을 먹는 모습을 한번씩 보니 모든 행동이 예뻐 보였다. 가능성과 긍정, 희망, 꿈… 과 같은 단어들이 ‘보글보글’ 오락실 게임의 물풍선처럼 보글보글 피어올랐다.

음식은 감성



옆 테이블 아이들의 흘러나오는 대화 속에 과대와 같은 단어가 들렸다. 제대로 다시 보니 과잠을 입고 있다. 앳되게 봤는데 대학생인가. 계속 되는 대화 속에서 불어과, 중어과, 스페인어과와 같은 단어들이 들렸다. 어학 전공 단어만 나오는 것을 보며 혹시 특목고 학생들인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입고 있는 체육복 바지의 색깔이나 두 줄의 줄선 같은 것이 왠지 익숙하다. 혹시 후배들인가.


사장님이 주방 안에서 아이들을 부른다. 거기 학생들 일로 좀 와봐, 미안해. 나 좀 한 번만 도와줘 학생. 당골인듯 아이들이 성큼성큼 주방 안으로 들어간다. 주문과 연관된 컴퓨터 모니터에 문제가 있나 보다. 아이들이 문제를 해결해 드리고 돌아와 자리에 앉는데 보니까 과잠의 팔 위쪽에 *FL이란 글자가 보인다. 내 후배 맞네 얘네들. 너네 *FL이야? 웃으며 말을 걸까. 뭐라도 좀 사주고 나와야 되나, 망설이고 있는데. 드르륵 의자를 빼며 일어난다.


마침 그때, 배시시 긍정 에너지의 여학생도 일어나 키오스크 옆 배식구에 그릇을 반납하고 돌아나오다 그 후배들과 동선이 겹치며 마주친다. 아까 고마웠어요(후배들이 배시시-희망 여학생에게 무언가를 도와 주었었는지). 배시시 여학생이 환하고 창백하게 배시시 웃어 보이며, 그렇게 다 나갔다.


너무 정겨운 곳이어서 일어나기가 싫었다. 내심 새우튀김을 더 먹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고독한 미식가도 퇴식구로 다가가 쟁반을 올려놨다. 어차피 이곳에 자주 오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맛있게 드셨어요? 마침, 주방 안의 퇴식구 바로 뒷공간에 계셨던 친절한 아주머님이 눈을 마주치며 묻는다. 잘.. 먹었습니다. 들어올 때보다 조금 밝아진 표정으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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