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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분

by jungsin

#1

최근에 꽂힌 과자다. 일본 과자인데 미니 도너스에서 아카시아 꿀 맛이 난다. 동네 백화점 지하 식료품 코너에서 판다. 가격은 천 원(원가 삼천오백 원). 약간 퍽퍽하지만 쓴 커피와 함께 먹으면 오히려 어울린다. 브라질이나 콜럼비아 원두로 내린 아메리카노와 먹으면 그야말로 꿀조합이다.



#2

클레어 키건의 책은 나의 to read list 최상위권에 오랫동안 있었는데, 떡하니 ‘버리기 아까워서 싸게 파는 책들’ 코너에 있는 것이다. 가격은 천삼백 원(원가 만 삼천팔백 원).


앞부분이 조금 찢어져 있다고 상품성이 이렇게 떨어진다니. 우리나라 출판계만의 특징인지 모르지만, 책의 가치를 외형적으로 너무 완벽한 기준으로 매기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만물의 가치에 민감한 내 균형감에 이건 너무 불균형적이고, 내 입장에서는 은혜롭다.


옛날 같으면 죄책감에 아득바득, 꼬치꼬치 직원한테 물어봤을 것이다. 이 책 왜 이렇게 싼 거예요? 가격 한 번만 더 확인해 주세요. 이 가격에 사도 괜찮은 것 맞나요? 너무 멀쩡한데… 이래도 되나 모르겠네요. 아.. 스읍.. 일단 결제해 갈게요. 혹시 나중에 문제 있으면 제가 전화번호 남겨드릴테니까… 정말 질리는 스타일이었는데. 이번에는 아무 소리 안 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앞 몇 페이지가 조금 구겨지고 찢어진 것과 약간의 밑줄을 제외하면 표지나 종이 질감 모두 새책 수준이다. 내 안목에서 적정가는 오천 원 정도. 어쨌든 누가 탐낼세라 얼른 집어들고는 출판사와 서점에 죄진 마음을 안고 카운터로 다가갔다. 왠지 눈치가 보여 결제하는 동안 카운터 직원하고 눈도 제대로 못 마주쳤다. 천 삼백 원입니다. 포인트로 할게요오…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길티 필링 결제 타임을 무사히 지나갔다.




#3

68년생인 클레어 키건은 아일랜드인이다. 아일랜드란 나라가 오랫동안 궁금했다. 대학 때 영문과 교수님과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리너스 독서모임을 하며 받았던 인상 때문에 더블린이란 도시에 꼭 한 번은 가보고 싶었다. 어질어질한 영문으로 된 Dubliners를 꾸역꾸역 읽어나가며 아.. 영문학이란 이런 거구나, 처음으로 그것에 대한 놀람과 경외감에 젖었었다. 그의 짙은 문학성의 잔향이 아직도 목구멍에 남아 있는 것 같다.


사람이나 문화나, 늘 보이는 것 너머의 보이지 않는 풍요에 관심이 있다. 아일랜드, 더블린, James Joyce, 그리고 Clair Keegan. 그런 것들은 입안에 담고 있기만 해도 아카시아 벌꿀 도넛처럼 달콤하다. 어떤 연유에서였는지, 이토록 나는 사람이나 문화 안에 응축된 정신적 자산에 지대한 관심을 갖는 사람이 되었다.



#4

집을 나서기 직전까지 무력감이란 유령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하루종일 먹은 것은 크래커와 치즈, 밥 반 공기와 먹다남은 매운탕 국물, 푸석한 반찬 정도. 도너스를 사야 되는데. 백화점에 가야 되는데. 미니 도너스 먹고 싶은데-란 생각이 하루종일 괘종시계의 초침 소리처럼 머리속에서 째깍였다.


졸업의 표상섭 선생님 문학 강의도 들어보고, 궁금한 예능들도 순례해 보다 중학교 때 나를 좋아해 주시던 선생님이 떠올랐다. 역시 없네.. 대신 검색 리스트에 중학교 교가가 있어서 멍하니 틀어놓고 보았다. 불암산 우뚝 솟은.. 수락산 정기를 받아..


다 어디 간거야, 수락산 정기. 어쨌든 어떤 정기인지는 몰라도 무슨 정기론가 겨우 기립했다. 백화점이 문을 닫기 십오 분 전쯤 자전거의 킥스탠드를 세차게 발로 찼다. 캄캄한 암흑과 백화점 일 층의 금빛 휘황찬란함 사이의 간극은 불과 오 분이었다. 불과 오 분.


그 오 분이 오 톤처럼 무거웠다. 그러다 청백 운동회의 백군 마지막 주자처럼 도너스를 낚아챘고,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을 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내겐 사소하지 않다. 다, 지독하게 무겁다. 생과사는 깃털 하나 차이인데. 선생님. 선생님은 어디 계시나요. 하키부 들어가지 마. 너 글, 재밌어. 교무실로 불러서 그러셨던 것이 왜 그런지 아직도 제 가슴속에 남아있어요. 잘못한 사람처럼 입을 꾹 닫고 아무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쭤보고 싶었어요. 제 글이 어떻게 재밌는지. 하키부 인생과 인문계 인생의 차이는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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