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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에밀리아 페레즈를 보다

무척 사적인 감상평

by jungsin



또 다시 혼자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았다. 개인사 최근 이십 년 구간에 두번째 일이었다. 첫번째는 한달 전쯤이었다.



이번에 본 영화는 '에밀리아 페레즈'. 별점평을 먼저 매기면 ⭐⭐⭐⭐. 네 개의 별 중 세 개 반은 뮤지컬적인 극의 예술성에 속한다. 영화의 시작에서 약 이십 분 정도까지는 관객을 압도하는 뮤지컬적 예술성과 스토리 텔링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중후반부로 가면서 미스테리한 분위기를 잃어버리고, 이야기가 대기권에 막혀 찬란한 우주로 날아가지는 못하는 느낌이었다. 별점 네 개는 충분히 받을 수 있는 영화라고 느낀 연유는 순전히 극 초중반까지의 예술성과 스타일리쉬하고 미스틱한 낯섦(중남미 특유의 분위기인지 감독의 것인지 모를)에 있었다.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뮤지컬 퍼포먼스와 노래하듯 시를 낭송하듯 풀어 헤쳐지는 대사의 읊음들


에밀리아 페레즈의 낯섦은 정말이지 강렬했다. 시네필(cinephile)과 한참 거리가 먼 내게 이런 식의 시네마틱 스토리텔링은 처음이었고, 처음이었으니 흥분되고 설레는 것일 수밖에. 그러니까 그것은 남자들이 제일 예쁜 여자를 ‘처음 보는 여자’라고 말하는 이유와 어느 정도는 상통하는 것이기도 했다. 열일곱의 첫 넥타이 교복과 첫키스, 스무살의 첫 대학로처럼 가슴 터질듯 설레지만 한 번에 소화하기 벅찬 것들이었다.




뮤알못 어드밴티지와는 상관없이 이 영화 속의 뮤지컬 넘버들이란 자기 안에 이미 무척 독창적인 어떤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 것이리란 감각 정도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전형적인 뮤지컬 곡들의 연장선에 있는 넘버들은 아닐 것 같았다. 속삭이듯 이어지는 감미롭고 리드미컬한 노래와 대사를 숨죽이고 따라가면서 새까만 밤바다의 형광빛 부표처럼 부유한 단어는 '아름답다'. 아, 아름답다.. 아.. 예술성... 아득히 영화에 매료되며 빨려들어갔다.


중반 이후의 전개는 다소 통속적이었다.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이야기 전개를 통해, 인간 내면을 탐구하기란 한계가 있었다. 아, 예뻤는데. 못 생겨도 저대로 풋풋하고 신비롭게 가는게 좋았는데. 성전환 수술 후에 부풀어오른 에밀리아의 입술처럼, 이스트가 많이 들어간 빵 반죽처럼, 이야기가 은근슬쩍 부풀어오르더니 그 고집스럽고 맛있던 독일빵이 나중에는 파리바게트가 다 되어 있었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98년에 비디오 테이프로 빌려서 지방대 근처 원룸에서 혼자 보던 첫 8월의 크리스마스가 가장 좋았다. 이후에 스트리밍으로 아무리 다시 보기를 해도 더는 그 8월의 크리스마스는 아니었고, 끝까지 보지도 못했다. 8월의 크리스마스의 8밀리 테잎 톤이 은근슬쩍 디지털하고 팬시한 하트페어링으로 바뀌고, 깜장 머리띠를 한 시골 주차단속 요원 심은하가 애간장을 녹이는 이탈리아의 하늘(하트페어링 여자 출연자)로 바뀌어 있을 때의 배반감 같은 것이 영화의 중반 어느 시점 이후로 느껴진 건, 고지식한 나의 취향 때문일까.


그럼에도 별 네 개는 이 영화의 최소한이리라. 이 영화만이 가지는 아름다움과, 시적인 가사들이 던지고 있는 내속의 영혼과 그가 느낄 행복에 대한 질문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지 며칠이 지났건만. 아직까지 물보라를 일으키고 있는 숱한 물음의 물결과 잔잔한 파문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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