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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의 역설

출발 맥모닝와이드페이지

by jungsin



모닝와이든지 맥모닝인지 그런 글쓰기 훈련법이 있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바로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그냥 마구 쓰는 것이 노하우라고.


중요한 것은 이때 자기의 감각과 생각을 정제하거나 윤리적으로 단속하지 않고 본능을 따라 쓰라는 것이다(제임스 조이스가 율리시스를 쓸 때 사용했다는 의식의 흐름 기법처럼). 아. 모닝페이지. 모닝페이지라는 이름이었던 것 같다.


글쓰기 플랫폼에서도 그렇게 루틴하게 글을 쓰는 사람들을 더러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루틴하게 글을 쓰는 사람들 중에 (꼭 모닝페이지가 아니더라도) 정말 글이 좋다고 느낀 경우는 아직 없었다. 오히려 시차를 두고 이따금 한 번씩 업로드가 되는 글 중에 좋은 글이 있을 확률이 높았다.




글쓰기는 정직하다. 쓰는 사람이 꼭 남기고 싶은 순간을 절실한 마음으로 기록하는 경우나, 정말 쓰고 싶은 픽션의 아이디어가 전광석화처럼 떠올랐을 때 마침내 펜을 들어 그것을 끈질기게 붙들고 몰입해서 쓴 글은 그렇게 쓴 흔적과 정성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커피를 사랑하는 바리스타가 진중히 좋은 원두의 품종을 고르듯 단어와 문장을 고르고 골라 천천히 내린 드립 커피처럼 누군가 맑게 쓴 글을 대하면 기분도 맑아지는 것만 같다.


그러니까 글쓰기에 있어 꾸준함과 성실함이란 다른 어떤 분야와 마찬가지로 그 안에 영혼이 있었을 때 의미있는 일이 될 수 있을 뿐이다. 혼신을 다한 성실함은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의미없이 반복하는 글쓰기 루틴은 어느 정도 글쓰기 수준까지를 보장해 줄 수 있을 뿐일 것이다. 그리고 그 수준이란 아마 아예 글을 안 쓰던 사람이 이제 막 글쓰기를 좋아하기 시작하여 쓴 글보다 더 재미가 없을 수 있는 수준을 말한다.


필자의 생각에 원인은 간단한데, 글쓰기는 기예가 아니기 때문이다. 글쓰기가 기예였다면 매일 반복해서 좋은 글쓰기 서커스 단원이 될 수 있었을 테다. 하지만 글쓰기는 예술에 속해, 아니 무엇보다 예술이어서 그렇게 될 수 없다.


기예적 글쓰기는 깊이를 더해 가는 태도의 쓰기가 아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열심히 한다고 빠질 수 있는 무엇이 아닌 것처럼, 꾸준히 잘해준다고 그녀의 마음을 얻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처럼, 오히려 스토커로 신고받을 수 있는 것처럼. 글쓰기에 있어 열정과 성실함이란 반복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일 수 있다.


글쓰기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무언가를 반복해서 열심히 한다고 그것이 꼭 성실한 태도가 되지는 않을 수도 있다. 열심히 하는 게으름이 있다. 어쩌면 무언가에 신경과 에너지를 쓰기가 귀찮아서, ‘정말 쓰는 고통’을 느끼기가 싫어서 기계적인 루틴 속에 자신을 끼워넣으며 그것이 글쓰기에 대한 자기의 열정을 대변해주기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런 태도로 쓰는 사람이 쓴 글을 글쓰기를 사랑하는 사람의 글이라고 느끼기는 어렵다.




대신 올라오는 글의 빈도수가 높지 않은 사람의 글이 좋은 경우를 필자는 많이 본다. 글쓰기를 너무 사랑해서 글을 빈번히 쓰지 않는 사람이 있다. 글쓰기를 남발하고 남용(abuse)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사람이나 물건을 아끼는 마음과도 결을 같이 한다. 가령 너무 사랑하는 여자의 몸을 함부로 대하고 싶지 않은 마음 같은 것이다. 너무 문학을 사랑해서 절필하는 사람이 있듯이 말이다.


다작을 하는 사람이 어떤 욕망에서 다작을 하는지를 잘 들여다 봐야 한다. 그가 무엇을 사랑하는지, 그가 정말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살피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쓰는 글 자체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곤 하니까.


다작이 그 자체로 나쁜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글과 문학을 아끼는 마음이 아닌 다른 동기에서 다작을 하는 사람은 다독과 다상량을 함께 하고 있지 않을 확률이 높고, 그런 사람이 좋은 글을 쓰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모닝페이지를 아무리 성실히 써도 다독, 다작, 다상량 중 유독 하나의 요건만 불균형적으로 충족시킨다면 그의 다작은 쌓이지 않고, 십 초마다 밀려오는 파도의 거품처럼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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