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의 로맨틱 코미디
오래된 당골 서점의 여직원에게 독특한 감각으로 끌리는 것을 느꼈다. 독특한 감각이란 역사적으로 좋아하는 스타일이 전혀 아니었는데, 나는 저렇게 생긴 여자를 한 번도 좋아한 적이 없었는데. 잔잔하게 좋은 기분에 사로잡힌 경험을 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파고波高가 낮고 물결이 너무 잔잔해서 그것을 설렘이라고 불러도 좋을지는 모르겠다.
전형적인 한국인의 눈. 심심한 무-쌍꺼풀에, 역시 심심한 코와 입과 얼굴형. 챗 지피티에게 한국인 여성의 평균 몽타주를 그려달라고 하면 딱 이렇게 그려줄 법한 마스크였다. 전형적이지 않은 것이라곤 큰 키밖에 없었다. 그마저 요즘 추세를 생각하면 흔한 것이었다.
결제하며 마주설 때나, 테이블에 앉아 책을 보고 있는데, 덜컹 나타나 어지럽게 놓인 책들을 서서 정리할 때. 비좁은 서가에서 맹하게 서성이고 있는데, 그녀가 무척 빠른 걸음으로 스치듯 지나쳐갈 때면 마음이 잔잔히 울렁였다. 팔팔 끓지 않는데 미온하게 이끌리는 것이었다. 이런 자신이 낯설게 느껴졌다. 수수해 보이는 이성에게 이끌리는 자신이 말이다. 학창 시절부터 평생, 평범을 거부한다고 입버릇처럼떠들고 다니던 나였는데.
못생겼어. 한눈에 보고 디지털하게 처음 출력된 정의는 밋밋함이었다. 플레인plain함, 또는 플랫flat함. 숫자의 감각으로는 0이었다. 단순하고 무식한 남자에게 0은 없는 것. 으레 그렇듯 그렇게 시선에서 배제되었다. 자동화 로봇처럼 나의 계산을 도와주는 휴먼. 서가를 부지런히 오가며 내가 볼 책을 정리해 주는 여자사람직원.
이상하게도 어떤 순간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게 계속 로봇으로서 마주치다 어떤 시점 이후로 그녀가 아날로그하게 다가왔는데. 이런 느낌이 도대체 얼마만인지. 언젠가부터 살아 일렁이는 감정을 느끼는 일은 그 자체로 무척 이례적인 경험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날로그는 계산이 오래 걸린다. 디지털이 초등학생식의 계산법이라면 아날로그 계산법은 어른의 방법이었다. 아날로그식답게 입력이 뚜렷하게 되지 않았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이건 0이 아니다. 0의 여집합이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0 밖으로 무한히 펼쳐진 우주의 감각. 새까만 귀신의 집에서 발이 푹 빠지고 입에 피가 묻은 귀신이 눈앞에 나타나는 구간이 언제일지 모르겠는, 미지의 두려움. 그 울렁한 느낌을 도무지 해석할 수 없었다. 고장 난 프린터기처럼 @#$%%%% 온통 특수기호가 찍혀 씹힌 채 출력되었다.
그녀에게는 고유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것은 비대칭적인 것이었다. 동양적인 얼굴매와 몸선에 서양적인 키와 골격. 내향성과 외향성이 겹쳐 보이는 분위기. 페미닌한 생머리에 우람한 팔뚝 근육. 그녀의 역설은 어지러웠다. 어지럽히고 흐트러트려 두려웠다.
왜인지 선명하게 명랑하거나, 분명하게 내성적이거나 어두운 것은 지루하다고 느끼는 나여왔다. 어떤 한 유형의 모습이 또렷이 드러나는 사람은 인간이 가지는 인격적 특질을 생각했을 때 진솔하지 않은 사람일 것이었다. 그게 진정한 자기의 모습이라면 깊이감이 없을 것이었다. 사람에 관한 한 선명함이란 성질은 나에게 매력적인 것이 아니었다.
왕조현은 예쁜가. 물론 미칠 듯이 예쁘겠으나 그런 식의 예쁨은 지루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나였다. 왕조현과 데이트도 물론 너무나 해보고 싶었지만 한 번, 하루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로맨틱 코미디를 매일 보고, 돌체 라테를 매일 마실 때 느낄 단 맛의 지겨워짐. 쇼팽과 바흐 중 평생 하나의 음악만 들어야 한다면, 바흐를 선택하고 싶은 마음. 여생 동안 매일 미트볼 스파게티를 먹을지, 매일 밥을 먹을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하게 될 생각 같은 것. 그런 생각과 밥맛의 아련함 같은 게 당골 서점의 여직원에게는 머금어져 있었다.
어릴 때는 땡볕이 내리쬐는 한낮의 뜨거운 선명함을 좋아했지만, 서른을 넘기면서는 하늘이 붉어지는 이십여 분 찰나의 매직 아워가 좋아졌다. 달과 해의 개기일식이 일어나는 순간의 신비로움 같은 것이 나의 깊은 마음을 건드렸다. 그 서점 여직원에게는 그런 느낌이 코팅되어 있었다. Born to read. 그녀의 폴로티 등에 적힌 것처럼 그녀를 읽고 싶었다.
카카오페이로 해주세요. 쓸데없이 낮고 두꺼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자신이 창피했다. 결제 모니터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왜인지 웃음기가 머금어져 있었다. 왜지, 왜 웃지. 나도 모르게 결제가 끝날 때까지 숨을 꾹 참고 있었나 보다. 숨을 쉬면 이상한 감정이 입 밖으로 새어 나가기라도 한다는 듯이. 한 번씩 힐긋 훔쳐본 순간들의 미스틱한 느낌을 무슨 풍운의 꿈처럼 품고 계단을 올라오자, 비로소 봄밤의 찬 바람이 폐에 들어왔다. 손에는 나의 인생에 일체, 조금도 필요 없는 바질 비누 하나가 들려 있었다.
* 한 번은 써보고 싶었는데 무척 오랜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써보았습니다. 소설 같기도 에세이 같기도 하죠? 장르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