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원 적립되셨네요.”
오랜만에 보는 동생과 한동안 옛이야기를 했다. 난 집중이 잘 되지 않는 스터디 발표 시간을 겨우 때웠고 그는 주말을 앞두고 퇴근한 저녁이었다. 우린 판교에서 매운 닭갈비를 먹었다. 나 혼자 테슬라 한 병을 뚝딱 비워버렸다.
그가 옛날에 만나던 여자애 집 근처에 나를 내려주었다. 그의 집도 그 근처였던 것이다. 취기가 오르며 차에서 옛이야기를 하다가 너무 흥분했다.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옛날에 만나던 사람의 도시 어귀에 내려버렸다. 우연이었다. 대화에 푹 빠져있다 보니 그렇게 됐다. 그냥 지하철을 탔어야 했는데 난 너무 테슬라를 마셨고 너무 옛이야기를 심취해서 했다. 결국 (완전히) 헤어지고 처음으로 그녀의 동네를 향해 걸어가 보았다. 뚜벅뚜벅 걸어갔다. 내가 걸어간 것이 아니었다. 테슬라와 닭갈비가 걸어갔다. 근처 편의점에서 맥주캔 하나를 더 샀다. 내가 미쳤다. 미친 것이 정말 분명했던 것이 그 상황에서도 적립 큐알 코드를 내밀었다.
“주류는 적립이 안돼요.” 편의점 아저씨가 건조하게 말했다. ‘저는 비주류니까 적립해주시죠.’ 마음의 여유가 많았다면 그런 농담을 했을 텐데. 나는 이미 옛사랑의 동네에 와있다는 사실만으로 잔뜩 위축되어 있었다. “아 그래요? 하하.”
수긍하며 넘어가려고 했던 대답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좀 예의 없는 듯했던 점원의 태도가 살짝 비위를 건드렸다. 나는 적립이고 뭐고 정말 중요한 감정에 빠져있었고, 상황이 상황이어서 넘어가는 게 좋았는데. 이런 상황일수록 이상하게도 찝찝하고 꺼림칙한 느낌이 더욱 싫었다. 긴장하면 더욱 경직된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는 나였다. 사실 더욱 싫었던 건 이런 나 자신이었지만, 굳이 발끈하며 괜한 말을 보탰다. “원래 적립됐던 거 같은데...” 엄청난 신경전이었다. “3원 적립되셨네요.” 그것 봐. 내가 맞았다.
‘3원 적립됐네요.’가 아니라 ‘되셨네요.’라고 했다. 의도적으로 선택한 표현이었다면 ‘3원이라는 가치도 없는 돈 적립하셔서 얼마나 기분 좋으세요?’의 뜻이었고, 의도가 아니었다면 높임법 오류다. 3원을 의인화함으로써 화폐의 존재 가치를 쓸데없이 높이고 우리말을 오염시켰다. 링 위에 쓰러져 앙탈을 부리는 상대에게 발길질까지 할 필요는 없다. 웃으며 퇴장하는 것이 가장 완벽한 마무리였다. “아 네. 하하. 수고하세요.”
“생명은 오직 자유로울 때 가치가 있다.”
- 홍정욱, instagram.
사람의 자유와 선택이라는 것이 참 불완전하고 실수투성이로 얼룩져 이루어지는 것인데도 그것에 부여된 권한은 절대적이고 성스럽기까지 하다. 나는 그것이 신이 부여한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종교적 의미로든, 상식으로든, 법으로든 그것은 신성불가침한 지위를 가진다. 사랑하는 사람을 대할 때는 그의 자유와 선택을 존중해야만 한다. 아니 사랑하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성숙한 사랑일수록 그렇다.
‘봄날은 간다’에서 은수의 마음을 돌려놓을 힘이 없던 상우가 했던 가장 강렬한 표현이란 것도 고작 자동차 키로 은수의 차를 긁는 것이었다. 그 장면이 아팠다. 내 심장이 차키로 긁히는 것 같았다. 영화 내내 계속되던 먹먹함이 아직 채 극으로 치닫지 못했는데, 상우가 차키로 나의 설익은 눈물샘을 긁어내 터트려버리는 느낌이었다. 힘 없이 눈물이 터졌다. 결국 울어버렸다. 품위 있는 사랑의 감정이 아니었다. 패배감에 쪄든 못난이 울음이었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미움이었다.
코끝에서 뱃속까지 저릿해지더니, 자동차 키가 메스처럼 지나간 자리에서 수욱 하고 핏물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아, 그 사랑의 핏물은 이런 색깔이었구나. 네가 쥔 칼이 곪은 사랑의 환부를 가르고, 찢겨 풀어헤쳐지고 나서야 알았다. 이렇게까지 맑고 고운 색깔이었구나.
왜 좋아했고 왜 멀어졌고 얼마나 오래되었든 모두 살아 생동하는 감정인데 폐기해야만 했다. 3원어치 감정도 남김없이 지워야만 했다. 그게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게 맞았다. 절대적으로 그래야만 했다. 원래 진작에 태워버렸는데 이제 보니 다 밟아 끄지 못한 군불이 남아 있었다. 어쨌든 걷고 걸었다. 모르겠다. 꾹꾹 밟아 불씨를 꺼버리려 했는지, 사뿐사뿐 걸으며 불씨를 느끼려 했는지. 찬 겨울인데도 발바닥이 뜨거워졌다.
가방 속에서 커피 냄새가 진동했다. 뚜껑에 틈이 있는 텀블러여서 테이크 아웃 커피가 흥건하게 샜다. 커피가 세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옛이야기를 했더랬다. 공허한 발걸음을 하고 적립에 매달렸다. 계속, 계속 무언가 세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정신없이. 그때 나의 날들, 혹은 나와 너의 날들은 너무나 미숙했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도 변함없이 이토록 허술하고 미숙하다니. 이러한 사실이 희망 같기도 하고 절망 같기도 했다.
가방 안에서 엎질러진, 투샷을 추가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향은 향기롭기도 하고 너무 진해 역겹기도 했다. 용기 내 따지 못한 캔맥주가 큰 가방 안에서 굴러다녔다. 불법을 저지르는 것 같아 빠르게 걸었다. 아련하기도 하고 조금 설레기도 했다. 그러면 안 되었지만 그랬다. 엎질러진 커피처럼 정말 도무지 알 수 없는 향이었다. 실패한 것들에는 엄격한 끝이 있어야만 한다. 모두 지우고 잊고 버려야 한다. 추억은 영혼으로만 해야 한다.
적립이 안 된다고 했을 때, 아 네 하고 말았어야 자연스러웠는데. 왜 나답지 않게 꼬박꼬박 할 말을 했을까. 너무나 작은 가치인데. 웃음으로 넘기는 게 좋았을 것을. 나이 들어갈수록 나를 잘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잘 이해되지 않는 순간들이 너무 많다. 내 마음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어느 무엇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데, 옛사랑 동네에 한번 소심하게 와 보았는데, 편의점 적립조차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순순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걸까. 그런 감각들이 얹어지면 3원은 3원이 아니었다. 어쨌든 나의 집착대로 됐다. 나와 내 마음과 옛사랑의 추억과 정의를 지켰다. 아무것도 뿌듯하지 않았다. 나 자신이 싫었다. 역하고 아프고 두렵고 웃기고 설레고 기가 차고 혼란스러웠다.
300원이든 3원이든 적립이 되는데 왜 안 된다고 했나요 아저씨. 아저씨가 정말 도대체 뭘 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