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반짝 하는 저기 저 별님 같은

386의 센터 욕심

by jungsin


민주화 운동을 한 386 정치인들을 동경했으나 작금의 정치 현실을 보면 그들은 동경받을 만한 그릇이 아니었던 것 같다. 386 크리스천은 어떨까. 8, 90년대에 청년이었던 386 크리스천은 어느덧 준 장로 세대가 되었다. 목회자라면 담임 목회자 반열에 올라섰거나 중직을 담당하는 부목사 급이 되었다. 386 정치인들이 정치계의 중심을 차지하게 된 것처럼 386 개신교도도 교계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은 아무래도 너무나 많이 닮았다. 386 크리스천 세대에게 386 정치인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기대감을 갖기는 어렵다. 386 정치인들이 자신들은 민주화 운동의 주역이라는 나르시스적 도취감에 빠져있듯이 386 기독인들도 자신들이 한국 교회의 중흥기, 부흥의 주역이었다는 나르시스적 자의식을 갖고 있다.

라떼는 말이야. 금요일에 대학부 금철 예배를 하면 예루살렘 성전에 자리가 없어서 입장할 때 학생증 검사하고 들여보냈었어. 우리 때는 얼마나 기도를 열심히 했는지 금철에 목이 쉬어라 기도하고도 아쉬워서 컵라면 먹고 아동부실에서 밤새 2부 철야까지 했었어. 요즘 친구들은 신앙 다 잃어버렸지. 교회 카페에서 이천오백 원 짜리 라떼 한 잔 사주며 일장 간증한다. 교회 카페의 낮은 실내 온도에 라떼는 금방 식어가고, 청년들의 왜소한 영혼은 더욱 움츠러든다.

386 라떼 선배들은 어느덧 교회의 신학적 방향과 살림에 큰 영향을 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386 크리스천 선배들도 근본주의와 경건주의 신학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해 좁은 시야를 갖게 되었다. 이전 세대가 덧씌운 한계에 갇혀 과감한 개혁에는 실패하고 있다. 나르시스적 자의식에 사로잡혀 센터를 놓지 못하고 있다는 점까지 386 정치인들을 닮았으니, 386 정치인들과 평행이론에 가까운 유사성을 보인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기대와 주목을 받았으나 실망과 냉소를 불러일으키는 386 정치인들과 386 크리스천 선배들은 시대의 샴쌍둥이이고 개혁의 사생아다.

그들의 센터 병은 교회의 청소년과 청년들을 다음 세대라고 칭하는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자신들이 중고등부이고 대학생이었던 8, 90년대에는 한창 활발한 신앙 활동을 하며 이미 장년을 뛰어넘는 활기로 교회의 중심이 되어 주인공으로서 신앙생활을 했으면서, 왜 지금의 청년은 다음 세대인가. 누군가의 말처럼 “지금 살아있는 이 세대”인데 말이다. 처음부터 구분 자체가 의미 없고 이런 구분은 조금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굳이 그들이 나누는 식으로 나눈다면, 청년들에게 지금 세대의 자리를 물려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실버 장년과 함께, 이른 감은 있지만 386 세대까지 이전 세대가 되어주고 말이다.

장년과 청년 청소년 아동 유아까지 우리 모두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세대이고 모두 똑같이 삶의 중심 속에 있다. 장년에게 그런 것처럼 청년에게 주어진 시간도 다음이 아니라 지금 뿐이다. 청년은 교회의 미래가 아니라 교회의 현재이다. 교회의 회원이 아니라 주인공이다. 예배 시간, 직책 분배, 버짓 편성까지 청년 청소년 신자는 늘 다음으로, 다음으로 밀려왔다. 죽은 것도 아니고 안 태어난 것도 아니고 모든 세대가 present generation인데, 청소년 청년이 왜 next generation이 되어야 하나.

장년의 예배당은 대성전이고, 장년의 예배는 대예배인데, 청년들의 예배당은 왜 예루살렘 성전과 바울 성전이며 청년들의 예배는 왜 청년 예배인가. 목사님, 장로님들은 좋은 공간에서 회의하고 비싼 식당 가는데 왜 청년들은 허름하고 비좁은 공간에서 모임하고, 떡볶이와 중저가 피자와 김밥만 먹어야 하는가. 자유와 민주를 외치고 캠퍼스를 그리스도의 피로 물들이자고 노래하던 386 크리스천은 왜 이 묵은 차별을 끊어내지 못하는가. 386의 센터 병이 정치뿐 아니라 교회에도 창궐하게 퍼졌다고 보는 것은 무리일까.

‘내 인생은 단지 무언가를 위한 준비인가. 준비하고 준비하고. 혹 다가올 언젠가를 위한 연습인가. 연습하고 연습하다, 저물어가는 것은 설마 아니겠지. 준비하고 준비하다, 그렇게 끝나버리는 건 아니겠지. 연습하고 연습하다.” 이적이 작년 11월에 발매한 앨범에 실린 <준비>란 곡의 가사다.

“뭐가 의미 있나. 뭐가 중요하나. 정해진 길로 가는데. 축 처진 내 어깨 위에. 나의 눈물샘 위에. 그냥 살아야지. 저냥 살아야지. 죽지 못해 사는 오늘. 뒷걸음질만 치다가 벌써 벼랑 끝으로. 어차피 인생은 굴러먹다 가는 뜬구름 같은, 질퍽대는 땅바닥 지렁이 같은 것. 그래도 인생은 반짝반짝하는 저기 저 별님 같은. 두근대는 내 심장. 초인종 같은 걸.” 2010년에 발표된 옥상달빛의 <하드코어 인생아>의 가사다.

두 곡은 동시대의 곡이 아니다. 각각 다른 시대를 노래하는 두 곡의 간극은 10년이다. 3년도 아니고 5년도 아니고 자그마치 10년이다. 10년이 지나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더 절망적이 되었다. ‘그래도 인생은 반짝반짝하는 저기 저 별님 같은’ 것이라며 캄캄한 밤 중에도 심장의 두근두근함을 느끼던 하드코어 청춘은 어느덧 날이 새어가는 자신의 청춘을 바라보며 ‘준비하고 준비하다 끝나버리는 건 아니겠지’라고, 체념에 가까운 혼잣말을 한다. 한밤 중에도 새벽의 미명을 기대하던 하드코어 인생은 밤새 아침을 준비하는 동안 자신들이 빠진 아침이 밝아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가슴 시린 희망을 붙들고 있던 짙푸른 하드코어 인생은 잿빛 하드코어 준비 인생이 되었다.


목사들은 예수를 바라보라고 한다. 청년들은 말하고 싶다. 예수를 바로 보라고.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좀 가리지 말고 비키든지, 도와주려면 제대로 도와 달라고. 하나님과, 우리 자신과,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우리의 현실을 이제 우리도 바로 좀 보게 도와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세상과 교회를 변화시키기는커녕 구두굽이 달도록 담임 목사 비위나 맞추고 다음 세대를 위한 회의만 하고 라떼 아트나 펼치는 386 센터 크리스천의 말 뿐인 다음 세대 비전보다, 일반 아티스트들의 위로가 청년들에게는 훨씬 더 공감되고 위로되는 현실이다. 다음 세대라 불리는 ‘지금’ 세대를 향한 진정성 있는 위로의 언어는 교회 안보다 밖에서 찾기가 더 쉽다. 처음에는 마땅히 그들에게 맡겨졌을 예언자적 파토스는 더 이상 신학자와 목사에게서는 찾기 어렵고, 뮤지션과 화가와 작가에게서 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보편적인 세속화가 이뤄지고 있는 것일까, 보편적인 성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기이하고 모호한 교회의 미래가 다가오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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