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만 읽고 글만 쓴다.
-라고 쓰고 싶지만 실은 그것들만 빼고 할 거 다 하며 지냈다.
국그릇에 미숫가루를 두 숟가락 가득 담고,
냉장실 안에 있던 차디찬 물을 넣고 살살 풀고는,
알뜰하게 얼음을 가득 넣어 후루룩 마시고 누웠다.
그 외에도, 집에 들어오자마자 가방을 풀기가 무섭게 추출해 두었던 에스프레소를 얼음을 담은 유리컵에 붓고, 프레온가스통의 버튼을 눌러 짠 휘핑은 작은 금색 잔에 따로 담았다.
케이에프씨 에그타르트는 전자레인지에 혀가 데일 정도로 뜨겁게 데웠다.
그것들을 작은 쟁반에 빼곡히 담고, 맛이 묽어진 두번째 샷을 부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텀블러는 높이가 높아 쓰러질까 한 손에 들고. 나의 옥탑방으로 가져와서 에어콘을 22도로 틀고, 능숙하게 은은한 전구색 취침등과 캠핑용 랜턴을 켰다.
그 전에는 에스프레소를 뽑아놓자마자, 바로 볶음밥을 해먹었다.
노랑과 녹색 파프리카들과 당근과 감자를 모눈종이 썰기로 썰고 토마토를 깍둑썰기로 썰어 두꺼운 무쇠 팬에 올리브유를 붓고 볶다가, 참치액젓과 간장을 붓고 밥을 부어 중국집 요리사처럼 웍질을 하며 센 불에 볶았다. 열정적인 리듬이 꺼지지 않도록 곧 가스불을 끄고,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을 붓고, 케찹을 담뿍 뿌려서 큰 나무 수저로 고슬고슬하게 비벼 큰 그릇에 덜어놓고, 미리 풀어놨던 계란물로 두툼한 겨울 이불을 만들어 덮어서 식탁에 가져와 티비를 보며 먹었다.
중간중간 나처럼 힘없이 나는 가을 모기나 집게벌레, 작은 바퀴벌레 같은 것들이 내 눈을 피해 슬금슬금 기어다니는 것이 보이면 쓰레받기를 대고 빗자루로 쓸어담아서 무심히 창밖으로 내던졌다.
아무 막힘도 없었다. 모든 행동이 어른답게 능숙했다. 티비로는 다큐멘터리 3일 ’내일로‘ 편을 틀어두고, 할머니처럼 꼭꼭 씹어먹었다. 경양식 스타일의 오므라이스 볶음밥과 보고 싶었던 감동 다큐멘터리. 시원한 스탠드 에어콘. 이어서 먹을 곡물 식빵과 해쉬브라운은 오븐 받침에 넣어두고 타르트도 오븐 위에 챙겨 놓았다. 철야가 끝난 깊은 새벽. 온세상이 고요했고, 적어도 이 순간은 순조로운 삶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다큐는 10년 전 한여름에 기차 여행을 하는 청춘의 풍경을 담고 있었다. 고요한 새벽에 부지런히 오물거리며 담담히 20대들의 싱그러운 모습을 보고 있는데, 왜 그런지 시종일관 몽글거렸다. 아무것도 아닌 말들에 깔깔거리며 웃고 금새 또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는, 생생히 살아있는 청춘들의 풍경이 미묘하게 옛스러운 10년 전 화질에 담겨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삭거리는 파프리카를 씹어먹으며, 피디와 아무것도 아닌 대화를 주고 받는 그들의 모습에 나는 폭 빠져들었고.
그러는 동안 계속 솟구쳐나오려는 질문이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꼬집어서 표현할 수 없었다. 틀림없이 있었다. 어떤 물음이 꿈틀거리며 간지럼을 태웠다. 분명한 건 그것이 내게(지난 내게가 아니라 앞으로의 내게) 아주 중요한 질문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애써 억누르려 해도 소용없었다.
가령 표면적으로는 이런 것이었을 테다. 그들은 아무것도 손에 쥔 것이 없이 그토록 아리고 생생하게 살아있을 수 있었는데. 나도 그랬는데. 나는 지금 왜 이토록 지루하고 메마른 표정으로 딱딱한 의자에 혼자 앉아 모눈종이 썰기한 파프리카나 오물거리며 그들의 모습을 감상하게 된 걸까. 생에 궁금한 것도 재미도 하나 없는 영혼처럼 앉아 먼 발치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먼 발치서 바라보고 있는 묘한 기분이었다.
모든 일들을 너무나 능숙하게 하는 섬세한 한 어른을 혐오하고 싶었다.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조롱하고 싶을 만큼 너무나 작은 마음으로 비좁은 세계에서 멍하니 야채볶음밥을 먹고 있는 그와, 그들처럼 생생히 살아서 동해로 기차 여행을 떠나던 열아홉의 그 사이에는 어떤 트라우마 사건이 있었을까. 왜 살아있을 생각조차 하지 못할 만큼 모든 것이 마비된 걸까. 무기력과 절망, 우울 같은 말로 표현되지 않는 얼음. 아주 오래된 나의 얼음에 땡을 해줄 친구가 저 멀리서 술레를 피하며 달려오고 있는 모습을 느린 화면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십오 년이면 늦은 밤 친구의 차를 타고 내려가, 내일로를 타고 친구들과 여행을 하고 있던 그녀와 중간에 만나 몇날을 함께 놀던 해였다. 여수 바다를 보고 높다란 대나무 숲을 지나, 사연 있어 보였던 젊은 명인의 대금 연주를 듣던 여름이었다. 그런 감각들이 내 일 같지 않고 다 저 너머의 기억들처럼 흩어져버렸었는데. 꿈틀거리던 질문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면 빙하기 얼음도 땡이 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